[하필QT]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 사도행전 21:1–16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곧장 항해해서 고스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로도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바다라로 갔다.
2 우리는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만나서, 그것을 타고 떠났다.
3 키프로스 섬이 시야에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섬을 왼쪽에 두고 시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 닿았다. 그 배는 거기서 짐을 풀기로 되어 있었다.
4 우리는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5 그러나 머물 날이 다 찼을 때에, 우리는 그 곳을 떠나 여행 길에 올랐다. 모든 제자가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우리를 성 밖에까지 배웅하였다.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6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에 올랐고,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이전의 본문에서 여행의 계획을 세우면서 무교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길 원했다. 그래서 가장 빠른 배편으로 갈아타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두로에 머무르게 된다.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만났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무르게 되었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느껴졌는데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두로에 머물렀다는 것이 예상외이긴 하지만, 그만큼 일정이 순조로왔다는 말일 수 있다. 또 이후의 배편이 준비되는 동안 머무르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에 두로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간곡한 요청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요청을 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하워드 마샬의 설명처럼 가장 단순한 해법은 두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고난을 예견할 수 있도록 성령에 이끌렸고, 그 고난을 듣고서 ‘자신들의 의지’로 바울에게 가지 말도록 촉구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여정을 이어가시면서 제자들에 의해서 계속된 ‘오해’와 반대에 부딪히셨음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기에 만류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속에서 반드시 마쳐야만 하는 길을 마치기 위해서는 ‘죽음’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부활을 향한 ‘과정’일 뿐이다. 그들도 헤어지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명을 좇아 달려가는 노쇠한 선교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분명히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7 우리는 두로에서 출항하여, 항해를 끝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신도들에게 인사하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지냈다.
8 이튿날 우리는 그 곳을 떠나서,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9 이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 있었다.
10 우리가 여러 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였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바울과 일행들은 두로에서, 돌레마이, 그곳에서 가이사랴로 이동한다. ‘일곱 사람 가운데 한사람’은 일곱 집사중의 한 사람이라는 말로, 전도자 ‘빌립’은 분명히 우리가 아는 빌립 집사다. 우리는 8장 40절에서 빌립이 가이사랴로 들어갔다는 말로 그의 행적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데 아직도 가이사랴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분명히 그는 집사로써의 직분이 있기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에서 부여받은 주된 역할이었겠으나, 그는 ‘전도자’가 되어 가이사랴에 머무르고 있다. 그 말은 그가 순회 전도인의 삶이 아닌 ‘가이사랴’의 교회를 세운 인물 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우리는 스데반과 빌립의 관계, 스데반과 바울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들이 함께 머무는 시간이 어떠했을지 모르겠다. 빌립에게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이 있었으면서도 바울에게 어떤 ‘예언’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상상이지만 이후의 그 집 안의 사람들의 말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는데 동참하는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자신의 동료 스데반이 죽은 것처럼 또 다른 믿음의 동역자 바울이 잡혀서 죽어야 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웠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손과 발을 묶고 성령께서 바울을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한다. 메시지는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예고된다. 바울은 잡힐 것이다. 죽을 것이다. 그런 예고가 점점 선명해지고 분명해진다.
12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14 바울이 우리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제 만류하는 사람은 그 집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포함된다. 즉, 바울의 동역자들로써 이 여행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너무나 분명하게 중첩되어 예고되는 이야기들로 인해 두려웠을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초연하게 대하며 이미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음 예고와 그에 대해 반대하는 제자들의 이미지들이 오버레이됨을 느낀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음이 임박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주저하지 않으셨다. 극심한 두려움에 기도하실 때,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고통에 차 기도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다’ 기도하셨다.
바울이 끝까지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들의 강권은 끝난다.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빈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닮아있다.
15 이렇게 거기서 며칠을 지낸 뒤에, 우리는 행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16 가이사랴에 있는 제자 몇 사람도 우리와 함께 갔다. 그들은 우리가 묵어야 할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나손이라는 사람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는 키프로스 사람으로 오래 전에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이제 여정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마침내 이어진다. 그곳에서 나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나손은 키프로스 사람으로 오래 전에 제자가 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당시 바나바와 함께 키프로스에서 전도했으므로 그때 만난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그 사람이 훨씬 ‘그리스적’인 사람임은 틀림없다. 전통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보다 어쩌면 그리스화 되어 있는 이들이 이제는 바울과 더 친밀했을 수 있다. 원숙해진 선교사는 사람과 문화를 초월해 교제나누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우리는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가 되었다.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때로 고통과 아픔과 핍박이 있을 지라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살리신 분이 있으므로, 또 우리를 살리실 것이므로, 죽음도 결코 이 복된 사명의 길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삶의 유일한 방향성이다. 바울은 그 방향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바울의 손에는 ‘복음’과 ‘성령님의 지시’라는 너무나 선명한 나침반이 있었다. 그 길을 갈 때 ‘죽음조차 유익’이 될 수 있다. 오늘 말씀 묵상하며, 우리에게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하면서, 그 일이 나에게 닥칠 변화와 어려움도 이겨내며 반드시 ‘복음’과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