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네가 사자의 먹이를 계속하여 댈 수 있느냐? 굶주린 사자 새끼들의 식욕을 채워 줄 수 있느냐?
40 그것들은 언제나 굴 속에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덮친다.
41 까마귀 떼가 먹이가 없어서 헤맬 때에, 그 새끼들이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조를 때에, 그 까마귀 떼에게 먹이를 마련하여 주는 이가 누구냐?
사자와 까마귀는 먹이를 위해 사냥해야하는 피조물로 등장한다.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냥의 성공여부’ 이다. 당연히 욥은 사냥의 성공여부에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먹이시는 존재시다. 아무리 강력한 짐승, 포식자라도 먹이 사슬이 끊어지면 사라질수밖에 없다. 그 먹이 사실을 유지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1 너는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들사슴이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 본 일이 있느냐?
2 들사슴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아느냐? 언제 새끼를 낳는지 아느냐?
3 언제 구푸려서 새끼를 낳는지를 아느냐? 낳은 새끼를 언제 광야에다가 풀어 놓는지를 아느냐?
4 그 새끼들은 튼튼하게 자라나면, 어미 곁을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염소와 들사슴의 생태주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셨음을 말해준다. 생태계의 운영과 틀, 그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모든 과정들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모든 싸이클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주어서 자유롭게 해주었느냐? 누가 날쌘 나귀에게 매인 줄을 풀어 주어서, 마음대로 뛰놀게 하였느냐?
6 들판을 집으로 삼게 하고 소금기 있는 땅을 살 곳으로 삼게 한 것은, 바로 나다.
7 들나귀가 시끄러운 성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아무도 들나귀를 길들이지 못하고, 일을 시키지도 못한다.
8 산은 들나귀가 마음껏 풀을 뜯는 초장이다. 푸른 풀은 들나귀가 찾는 먹이다.
들나귀를 통해서는 짐승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제공하고 그 공간을 자유롭게 영위하는 ‘채워짐’을 설명해준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세계는 결코 빈공간이 아니며 무질서가 아니다. 모든 질서들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영역의 분리와 충만한 채워짐을 경험한다. 현대 과학의 발견은 그것을 ‘진화’라는 설명으로 채워넣겠지만, 무작위성으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꼭 알맞는 적응의 지점들이 있다고 느낄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설명할 것이다.
9 들소가 네 일을 거들어 주겠느냐? 들소가 네 외양간에서 잠을 자겠느냐?
10 네가 들소에게 쟁기를 매어 주어서, 밭을 갈게 할 수 있느냐? 들소들이 네 말을 따라서 밭을 갈겠느냐?
11 들소가 힘이 센 것은 사실이지만, 네가 하기 힘든 일을 들소에게 떠맡길 수 있겠느냐?
12 들소가, 심은 것을 거두어들여서 타작 마당에 쌓아 줄 것 같으냐?
인간이 자연 만물의 많은 것들을 통제하며 생산성을 높여 살아가지만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 야생의 생물들 중에서 들소는 통제 할 수 없는 동물로 등장하고 있다. 가축으로 통제된 소는 쟁기를 주어 밭을 갈게 만들 수 있지만, 야생의 소는 인간이 원하는데로 통제할 수 없다.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은 왜 생겨나는가? 결국 그것 또한 하나님의 통제하심이 있기 때문에 나뉘는 것이다.
13 타조가 날개를 재빠르게 치기는 하지만, 황새처럼 날지는 못한다.
14 타조가 땅바닥에다가 알을 낳는 것은, 흙이 그 알을 따스하게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15 그러나 그 알이 발에 밟혀서 깨어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들짐승이 그 알을 짓밟을 수도 있음을 알지 못한다.
16 타조는 알을 거칠게 다루기를 마치 제가 낳은 알이 아닌 것같이 하고, 알을 낳는 일이 헛수고가 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도 하지 못하니,
17 이것은 나 하나님이 타조를 어리석은 짐승으로 만들고, 지혜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타조가 한 번 날개를 치면서 달리기만 하면, 말이나 말 탄 사람쯤은 우습게 여긴다.
타조는 재빠름이라는 엄청난 장점에도 불구하고 새처럼 날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있다. 그리고 알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과학적 설명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연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설명으로 읽는것이 좋겠다. 우리가 살펴보고있는 것처럼 만물에는 질서와 허락된 채워짐이 존재한다. 그 영역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타조의 장점과 단점의 설계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시다.
19 욥은 대답해 보아라. 말에게 강한 힘을 준 것이 너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달아 준 것이 너냐?
20 네가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만들었느냐? 사람을 두렵게 하는 그 위세 당당한 콧소리를 네가 만들어 주었느냐?
21 앞 발굽으로 땅을 마구 파 대면서 힘껏 앞으로 나가서 싸운다.
22 그것들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른다. 칼 앞에서도 돌아서지 않는다.
23 말을 탄 용사의 화살통이 덜커덕 소리를 내며, 긴 창과 짧은 창이 햇빛에 번쩍인다.
24 나팔 소리만 들으면 머물러 서 있지 않고, 흥분하여, 성난 모습으로 땅을 박차면서 내달린다.
25 나팔을 불 때마다, “힝힝” 하고 콧김을 뿜으며, 멀리서 벌어지는 전쟁 냄새를 맡고, 멀리서도 지휘관들의 호령과 고함 소리를 듣는다.
야생성을가진 타조외에 군마로 사용될 말은 인간에게 길들여지면서 그 특성으로 인해서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다. 이 시너지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이런 동물의 효과적인 인간의 다스림도 하나님의 허락하신 성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26 매가 높이 솟아올라서 남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 네게서 배운 것이냐?
27 독수리가 하늘 높이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네 명령을 따른 것이냐?
28 독수리는 바위에 집을 짓고 거기에서 자고, 험한 바위와 요새 위에 살면서,
29 거기에서 먹이를 살핀다. 그의 눈은 멀리서도 먹이를 알아본다.
30 독수리 새끼는 피를 빨아먹고 산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
이제 또 다시 통제력이 없는 동물, 가장 높이 나는 새, 독수리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독수리의 강력한 사냥실력은 앞서 맨 처음 등장하는 사자를 생각나게 만든다. 통제 불가능한 강력한 사냥꾼들이 있다. 인간은 그 모든 생물들에대한 통제력을 부여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통제하시며 다스리시며 그것들이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먹이까지도 제공하신다. 인간은 그 속에서 어떤 것도 마음대로 통제 할 수 없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인류의 강력한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정말 많은 발견과 발전을 이루어왔다. 많은 영역에서 이전세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업적들이 이루어져왔다. 어떤 이들은 과학의 발견이 자연에대한 무한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떤 종류의 발전도 실재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이 연구의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실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결국 어떤 핵심적인 통제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이다. 우리는 영생할 수 있는 권한도, 죽을 수 있는 권한도 없다. 과학의 발전이 우리를 100년 200년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한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밖에서도 무한한 세계를 언제든, 어떤 상황에든 안전하게 영위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든지 유한한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 우주적 혼돈과 악의 상징인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통해서 더 깊이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과 죽음마저도 통제력을 행사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할수밖에 없다. 그 모든 세계를 통제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할 때 우리가 허락받은 세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락된 세계가 이제 곧 영원한 세계로 발전하리라는 것또한 알기에 우리의 세계는 소망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주권적 세계를 인정하며 그 안에서 참된 위로와 소망 얻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우리는 통제된/통제되지 않은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배운다.
2.
모든 자연 만물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3.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통제력 안에 있다는 삶을 인정하라.
4.
그 안에서만 참된 위로와 안식을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