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오바댜가 아합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왔다.
17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
18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내버리고, 바알을 섬기십니다.
누가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는 자인가? 고통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재앙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를 아합이 엘리야에게 사용한다는 것은 엘리야가 어떤 종류의 불순종으로 재앙을 가지고 오고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아합은 완전히 바알 숭배자로써 엘리야를 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바알의 나라가 되어버렸고, 바알을 반대하는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하는 중이라는 말이 된다.
엘리야는 정확히 반대로 그 의미를 되돌려준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은 아합의 가문이다. 아합의 가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생겨난 고통이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19 이제 사람을 보내어, 온 이스라엘을 갈멜 산으로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세벨에게 녹을 얻어 먹는 바알 예언자 사백쉰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불러 주십시오.”
20 아합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부르고, 예언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다.
21 그러자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괴로움의 원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과 신들의 제사장들이 모두 갈멜 산으로 모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왕이나 제사장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제 본문에서 오바댜의 태도에 대해서 나눴듯이, 그들이 개인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폭주하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해버린다. 자신있게 나서서 하나님만을 선택하려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엘리야는 그들의 그런 우유부단한 태도에 대해서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냐’고 지적한다. 머뭇거리는 행동은 다리에 장애가 생겨 절게 되는 형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걸으며 뛰며 달려나갈 존재들이어야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우유부단한 신앙의 선택으로 인해 커다란 부상을 당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괴롭게 만들고있는 불순종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다.
22 그래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쉰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소 두 마리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십시오. 바알 예언자들이 소 한 마리를 선택하여 각을 떠서, 나뭇단 위에 올려 놓되, 불을 지피지는 않게 하십시오. 나도 나머지 한 마리의 소를 잡아서, 나뭇단 위에 올려 놓고, 불은 지피지 않겠습니다.
24 그런 다음에,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 때에, 불을 보내셔서 응답하는 신이 있으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각각 동일한 조건에서 과연 누가 참된 신인가를 증명해야 한다. 바알이 비를 내리는 신임과 동시에 구름을 일으키고 천둥을 무기로 사용한다. 천둥번개가 마른 장작을 때렸을때 자연스럽게 불이 일어날 수 있다. 과연 누가 진짜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신인가?
참된 예언자, 참된 하나님은 실재로 ‘증명’되어야 한다. 물론 증명된다고 곧바로 믿음과 회심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사실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왜곡된 인간의 지성은 사실을 왜곡해서 자신이 만들어낸 믿음을 믿어버린다.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증명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에 대해서 진실임을 증명하실 것이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수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시오. 소 한 마리를 골라 놓고, 당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지피지 마시오.”
26 그들은 가져 온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에,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응답은 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이 본문의 신랄한 지점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춤을 추다’ 라는 단어가 다리를 절게 되다, 머뭇거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앞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지적했을 때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우유부단한 모습의 문제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우상숭배다.
27 한낮이 되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소리로 불러보시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
29 한낮이 지나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엘리는 바알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러나 응답하지 않는 존재로 조롱하면서 제사장들을 채근한다. 그러자 바알의 예언자들은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몸을 찔러댔다. 율법에 따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소모하면서 신적 임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의 본문에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에게는 생명이 되돌아옴을 경험했는데, 바알은 오히려 그 생명을 빼앗아가고 있는 중이다. 미친듯이 날뛰는 제사장들의 행위는 원어의 표현으로는 ‘예언하다’ 라고 되어 있다. 그들은 예언했다. 그러나 그 예언은 거짓말이다. 생명을 빼앗아가는 말들이며 몸짓들이다. 피가 흐르고 사방으로 뿌려짐으로써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생명이 수여되거나 불이 내리는 증명은 이뤄지지 않는다. 오로지 생명이 빼앗기는 중이다.
이스라엘의 우유부단함이 우상숭배행위이며 그 행위가 보여주는 최종적 결과물이 ‘생명의 빼앗김’이라는 데서 충격적이다. 단호한 결심으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과 삶이 점점 갉아먹히며 거짓 예언과 행위들로 이 시대의 제단에 올려지리라는 끔찍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이 미친듯한 거짓 예언과 생명을 빼앗아가는 예배는 오로지 십자가 위에서 반전된다. 거짓 예언과 거짓 예배와 생명을 빼앗는 모든 행위들은 참된 하나님께서 참된 소망과 예언과 예배와 생명 수여를 십자가 위에 행하심으로써 뒤집어 놓으셨다. 십자가위에 죽기로 작정하는 자들은 그 길이 험난하여 때로 절며 기어가며 나아갈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수여받는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은 결코 어떤 것도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이 생명의 길은 비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으나 흔들림없이 선택하는자들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자. 이 믿음을 가지고 우유부단한 삶의 선택들을 청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길 선택하길 결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