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하필QT] 욥 3:1-26 / 가장 깊고 어두운 기도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1 드디어 욥이 말문을 열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2 울부짖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절망에 빠져 울부짖으며 자신의 생명을 저주할 정도로 망가질 수 있는가? 욥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욥의 완전함과 신실함은 하나님이 보증하셨다. 두번의 천상회의 속에서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주셨다. 그리고 이후에도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시는 매우 주의깊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완전한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자신의 생명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깊은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용인되는가? 곧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승리하셨다는 승리주의적인 환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깊은 어둠속에 침잠하며 고통에 울부짖을 수 있는가?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기 위해서 욥의 가장 어두운 울부짖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은 충분히 그럴수 있다.
3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 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4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제 것이라 하여, 검은 구름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낮을 어둠으로 덮어서,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더라면,
6 그 밤도 흑암에 사로잡혔더라면, 그 밤이 아예 날 수와 달 수에도 들지 않았더라면,
7 아, 그 밤이 아무도 잉태하지 못하는 밤이었더라면, 아무도 기쁨의 소리를 낼 수 없는 밤이었더라면,
8 주문을 외워서 바다를 저주하는 자들이, 리워야단도 길들일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자들이, 그 날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는 새벽 별들도 빛을 잃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도 밝지를 않고, 동트는 것도 볼 수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욥은 자신의 생명을 불평하고 저주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독백은 자신의 부모님의 즐거움조차도 저주스럽게 여긴다. 본문의 주된 심상은 깊은 어둠이다. 모든 ‘빛’과 ‘즐거움’이 제거된다. 심지어 ‘밤’ 자체에 기쁨의 소리 마저 없애길 바란다.
이 저주 속에는 리워야단이 등장하는데, 리워야단을 길들일 수 있는 마술사들의 저주가 밤을 지속하게 만들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리워야단의 파괴적인 승리가 차라리 자신에게 임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저주스러운 생에 대한 불평은 반대로말해서, 그 빛과 즐거움과 행복으로 인생이 시작되었음이 역설된다. 다만 지금 현재의 시점이 그 모든 빛과 즐거움과 행복을 앗아가고, 끔찍한 절망적 어둠만이 자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욥은 차라리 괴물과 저주하는 자들이 그 날을 저주 할 수 있었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41장에 가서 그 누구도 리워야단을 제어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그 모든 괴물과 악을 관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괴로움과 몸부림은 더 나은 설명으로 향하기 위한 끔찍한 어둠의 단계다.
11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
12 어찌하여 나를 무릎으로 받았으며, 어찌하여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렸던가?
13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은 내가 편히 누워서 잠들어 쉬고 있을 텐데.
14 지금은 폐허가 된 성읍이지만, 한때 그 성읍을 세우던 세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함께 잠들어 있을 텐데.
15 금과 은으로 집을 가득 채운 그 통치자들과 함께 잠들어 있을 텐데.
16 낙태된 핏덩이처럼, 살아 있지도 않을 텐데. 햇빛도 못 본 핏덩이처럼 되었을 텐데!
17 그 곳은 악한 사람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도 쉴 수 있는 곳인데.
18 그 곳은 갇힌 사람들도 함께 평화를 누리고, 노예를 부리는 감독관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인데.
19 그 곳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까지도 주인에게서 자유를 얻는 곳인데!
욥은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살아있는 것인가? 그런데 살아있음은 필연적으로 ‘쉬지못함’과 연계되어있다. 그래서 욥은 반복적으로 자신이 ‘쉴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정한다. 잠들고 쉬고 자유를 얻는 것은 죽음에서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있음으로 쉬지못하는 영혼은 선명한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이켜야 한다.
끊임없이 죽음을 향하여 바쁘고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나아가는 한 영혼의 절규는 진짜 안식을 찾아 헤메며 몸부림치는 괴로움이다. 욥에게는 쉼과 안식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에게 안식이 없다. 쉼이 없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지겹고 괴로운 생의 연속일 뿐이다.
20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 그들은 보물을 찾기보다는 죽기를 더 바라다가
22 무덤이라도 찾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23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
24 밥을 앞에 놓고서도, 나오느니 탄식이요, 신음 소리 그칠 날이 없다.
25 마침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밀어닥치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일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26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
욥은 하나님께서 길 잃은 사람을 붙잡으시고 길을 막으신다고 원망한다. 평화도, 안식도 없이 두려움만 끝없이 다가온다. 누가 평화와 안식을 줄 수 있는가?
이것은 깊은 고통에 직면한 한 인격이 내뱉을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반응이다. 우리는 이 반응에 놀라울 뿐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완전하고 의로운자도 끝없는 고통의 환경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들이 다다.
욥의 독백 앞에서 친구들도 하나님도 아무 반응이 없다. 물론 친구들의 거센 항의가 곧 이어지겠지만, 지금 이 참담할 정도의 고통 앞에서 욥은 오로지 고독과 고통에 찬 단독자다.
선명한 괴로움, 날 것 그대로의 처절한 외침은 듣고 있는 이들의 심장마자 죄게 만든다. 욥은 빛과 생명을 제거하시길, 안식이 주어지기를, 이 고독한 외침이 그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안식이 주어지기까지 엄청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시며 오롯이 혼자 십자가를 지고 달리셨던 예수님을 떠올리게 된다. 그분의 고통에 찬 외침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였다. 욥의 반응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침의 그림자다.
그럼에도 우리가 선명히 보게 될 것은, 정확히 이 고통의 ‘갚아주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갚아주심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욥을 그자리에 그대로,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갚아주심의 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아픔과 고통과 절규에 가득찬 기도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듣고 계시며 일하기를 준비하신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응답하심이 비로소 우리에게 임했을 때, 우리의 고통과 고난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신원되고, 참된 안식을 지나 새롭고 온전하게 변화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이 고통스러운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다만 기다리신다. 이 깊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반드시 함께 하신다. 그분은 그것을 위해 기꺼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의 깊은 어둠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올려드리며, 부디 속히 응답하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포인트
1.
참된 신자도 고통과 신음에차 울부짖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침묵과 빛과 즐거움이 없으며 안식이 없는 깊은 고독을 우리 주님이 당하셨다.
3.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다.
4.
하나님 안에서 부르짖어진 고통은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