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유다의 아하시야 왕은 이것을 보고 벳하간으로 가는 길로 도망하였으나, 예후가 그의 뒤를 추적하며 “저 자도 죽여라” 하고 외치니, 이블르암 부근 구르 오르막길에서 예후의 부하들이, 병거에 타고 있는 아하시야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 그는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28 그의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 그를 ‘다윗 성’ 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묘지에 함께 장사지냈다.
29 아합의 아들 요람 왕 제 십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예후의 반역과 요람의 죽음을 목격한 아하시야는 벳하간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예후는 아하시야를 추격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예후의 부하들은 아하시야를 찔러 므깃도에서 죽게된다. 므깃도는 갈멜산 인근에 있고,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대하는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붙잡혀 죽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모순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분명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숨어있었을 수 있고 도망을 위해 므깃도로 이동했을 때, 예후가 그곳으로 이동했을 수 있다.
어쨌든 아하시야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지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으나 우리는 이전의 예언에 의해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그가 아합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것이 지금 예후의 개혁에 후한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강력한 바알-아세라 신앙의 영향력은 유다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이런 판단은 예후에게 합당한 일이었다.
역대하의 기록은 죽음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아하시야를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했는지 모르지만, 결국 결혼동맹은 수많은 타협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을 보여준다. 므깃도에서 죽은 아하시야는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고 다윗 성에 장사지내지게 된다.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렀을 때에,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는,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
31 예후가 문 안으로 들어오자, 이세벨이 소리쳤다. “제 주인을 살해한 시므리 같은 자야, 그게 평화냐?”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문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내 편이 될 사람이 누구냐? 누가 내 편이냐?” 그러자 두세 명의 내관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33 예후가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져라.” 그들이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지니, 피가 벽과 말에게까지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여자의 주검을 밟고 지나갔다.
이제 심판의 이야기는 이세벨로 이어진다. 이세벨은 자신을 열심히 꾸민다. 이 꾸밈은 더욱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려는 최후의 치장일 것이다. 다시말해 그녀는 포로나 비굴한 모습으로 죽길 원하지 않는다. 막강한 여왕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자기 꾸밈은 실속이 전혀 없다. 이미 옆에 있는 자들마저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이세벨은 ‘제 주인을 살해한 시므리’ 라고 말하는데, 열왕기상 16장에서 이 시므리의 반역에 대해 읽을 수 있다. 아합의 아버지였던 당시 강력한 패권을 행사한 오므리가 바로 시므리를 끝낸 인물이었다. 따라서 ‘시므리같은자’ 라는 말은 결국 너도 그런 반역으로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말이고, 그 일들이 ‘오므리의 가문’에서 일어나리라는 [복수 예고]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수 예고는 더욱 예후의 개혁, 아합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는데 명분을 주었을 것이다.
예후는 옆에 있는 내관에게 이세벨을 던지라고 명령했고 이세벨의참혹한 마지막이 ‘꾸며진 여왕’과 대비되어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34 예후가 궁으로 들어가서, 먹고 마시다가 말하였다. “이제 저 저주받은 여자를 찾아다가 장사를 지내 주어라. 그래도 그 여자는 왕의 딸이었다.”
35 그들이 그 여자를 장사지내 주려고 찾아 나섰으나, 그 여자의 해골과 손발밖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36 그들이 돌아와서 그에게 그렇게 보고하니, 그가 말하였다. “주님께서, 주님의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르엘의 밭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주검을 뜯어 먹을 것이며,
37 이세벨의 주검은 이스르엘에 있는 밭의 거름처럼 될 것이므로, 이것을 보고 이세벨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
예후는 궁으로 들어가서 먹고 마시다가 ‘저주받은 여자를 장사지내라’고 명령한다. 예후가 떠올린 것은 정치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세벨이 시돈 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정치력을 위해서 복수와는 결이 다르지만 추대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예후의 정치적 판단과 상관없이 이미 이세벨의 시체는 사라지고난 뒤였다.
예후는 이 사건이 엘리야를 통해서 예고된 일이며, 나봇의 복수를 하나님께서 성취하셨다고 말한다. 즉, 예후의 쿠데타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이 아닌 하나님의 복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세벨의 꾸며지고 치장된 화려한 권력과 탐욕, 우상숭배와 음란함 등의 결합이 어떻게 잔혹하고 비참한 결말로 이어지는지 ‘겉으로 보고된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이세벨의 이름은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과 이어지며 타락한 권세의 전형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세벨은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여인과 대립하는 미련한 여인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악하고 미련한 여인으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공통점은 ‘참’인 것에 대한 ‘모방’이고, 모방을 통한 범죄다. 그리고 그 범죄에 대한 마지막이 심히 끔찍하리라는 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련한 여인이 제시하는 ‘유사하고 비슷해보이는’ 것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겉으로는 ‘왕’과 같고, 여전히 ‘권세’를 가진것 같지만, 곧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심판받을 권세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이지만 겉으로 치장되고 대단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참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유사하고 비슷해보이는 것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로지 참되신 우리의 왕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고정해야 한다. 그분은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으로 자신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참한 죽음에 머물러있는 이세벨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사랑과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줄 믿는다. 이 사랑을 온전히 드리길 소망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