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예후는 백성을 다 모아 놓고 말하였다. “아합은 바알을 조금밖에 섬기지 않았지만, 이 예후는 그보다 더 열심으로 섬기겠습니다.
19 그러니 이제 바알의 예언자들과 종들과 제사장들을 모두 나에게 불러다 주십시오. 바알에게 성대하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빠지는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예후는 바알의 종들을 진멸하려고 이러한 계책을 꾸민 것이다.
20 예후가 계속하여 말하였다. “바알을 섬길 거룩한 집회를 열도록 하시오.” 그러자 집회가 공포되었다.
우리는 이전 본문에서 예후가 여호나답의 손을 잡으며 ‘주님을 향한 나의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확인하라는 말을 기억해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바알 추종자들에대한 완전한 숙청으로 이어질 것이다.
예후는 아합의 지지자를 모두 죽였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분명히 ‘바알 숭배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후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서서 아합의 자녀들을 ‘모조리’ 살육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극단적으로 표출하려고 했던 것처럼 마찬가지 반응처럼 보인다.
예후는 바알을 ‘더욱 열심으로 섬기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성대한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안정을 취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이미 바알 신앙에 뿌리를 내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집회를 긍정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미 정치적 힘은 바뀌었고, 사람들의 종교심으로 안정화를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 정치전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멸’을 위한 계책이었다. 분명 예후의 이런 ‘진멸’ 전쟁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 ‘헤렘’의 차원에서의 진멸전쟁인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런 수준의 제거였음은 분명했다.
21 예후가 이스라엘 모든 곳에 사람을 보냈으므로, 바알의 종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왔다. 그들이 바알의 신전으로 들어가자, 바알의 신전은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가득 찼다.
22 예후가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거기 모인 바알의 종들이 입을 예복을 모두 가져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에게 입힐 예복을 가져 오니,
23 예후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은 바알의 신전으로 들어가서, 바알의 종들에게 말하였다. “여기 여러분 가운데 주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여기에는 다만 바알의 종들만 있어야 합니다.”
24 이렇게 하여 그들이 제사와 번제를 드리려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예후는 밖에서 여든 명의 군인을 포진시켜 놓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 손에 넘겨 준 사람을 하나라도 놓치는 사람은, 그가 대신 목숨을 잃을 것이다.”
25 번제를 드리는 일이 끝나자, 예후는 호위병들과 시종무관들에게 말하였다. “들어가서 그들을 쳐라. 하나도 살아 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그러자 호위병들과 시종무관들은 그들을 칼로 쳐서 바깥으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바알 신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서,
26 바알 신전의 우상들을 끌어내어 불태웠다.
27 바알의 우상들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바알의 신전을 헐어서 변소로 만들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까지도 그대로 있다.
28 이렇게 하여 예후는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로부터 쓸어 내었다.
예후는 바알 숭배자들이 옷을 입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제 바알 숭배자들은 그들이 입은 옷으로 구별됨으로써 더욱 확실히 제거될 것이었다. 혹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섞이지는 않았을까 반복 확인함으로써 미연에 불상사를 없애려고 한다.
예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든 명의 군인들로 하여금 바알에게 번제드리는 의식을 마친 이들을 살아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한다.
우리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예배를 마친 바알-아세라 숭배자들을 몰살한 기록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바알과 아세라는 강력한 힘과 풍요의 신이지만, 그들의 예배는 비참하리만큼 허무하다. 그들에게는 생명력이 없으며 그들을 지켜줄 힘따위는 없다. 오히려 우상을 섬긴 대가는 비참할 뿐이다.
바알 신전의 우상들은 끌어내어지고 불태워졌다. 바알 우상들은 깨졌을 뿐만 아니라 신전 자체를 분뇨로 더럽혔다. 이로써 신전에 대한 경멸적 심판을 행함으로써 바알-아세라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적개심과 분노를 표출했다.
계속 살펴보듯이, 이런 행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일부 정당성을 얻는다고 해서 모든 행위를 포괄해서 좋은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한 인물의 다면적 특성을 고려해야 하고 그 정치적 성질도 파악해야 한다. 예후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가 결코 ‘전심’을 가졌던 다윗의 후계자가 아니었음을 명백히 보여줌으로써 그의 한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29 그러나 예후는, 베델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섬겨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30 주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보기에 일을 바르게 잘 하여, 내 마음에 들도록 아합의 가문을 잘 처리하였으니, 네 사 대 자손까지는 이스라엘의 왕위를 지키게 될 것이다.”
31 그러나 예후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 기울이지는 못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예후는 베델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없애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금송아지는 출애굽 때의 ‘금송아지’ 복사판이다. 예후는 왜 베델과 단의 금송아지를 없애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으면서도 왜 금송아지만큼은 없애지 않았는가?
이에대해서 열왕기 기자는 아주 강조하면서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다고 20,31절에 반복한다.
반복되는 여로보암의 ‘죄’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막아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아닌 ‘대체물’을 만들었고, 대체물을 섬기롣록 만든 ‘왕’의 권위와 힘 앞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행위였다. 다시말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시도인 것이다.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 기울이지 못했다고 평가함으로써 그의 ‘열심’이 결코 ‘전심’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32 이 때부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금씩 찢어 내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국경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33 그는 요단 강 동쪽 지역인,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이 있는 길르앗의 모든 땅 곧 아르논 강에 맞붙어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공격하였다.
34 예후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과, 그가 권세를 누린 일들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에 모두 기록되었다.
35 예후가 죽으니, 사마리아에 안장하였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36 예후는 사마리아에서 스물여덟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하나님은 예후의 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영향력을 조금씩 감소시키신다.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이었던 요단강 동쪽 지역이 공격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점점 축소되어갔다.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하나님만이 왕이 되셨을 때, 그 나라의 영향력은 주변국으로 넓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왕이 되시지 않은 나라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축소되고 줄어들었다.
예후는 사마리아에서 스물여덟해 동안 상당히 긴 시간 통치하는 개혁의 군주로 일했지만, 결국 그의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에서 멈췄다. 정말 모든 죄에서 돌이키며 모든 금송아지를 부숴뜨리고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나라로 돌이켰다면, 이후 읽게되는 ‘아달랴’의 폭정과 다윗가문의 위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온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열심’이 하나님의 온 마음을 읽어내는 방식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한계는 결코 하나님의 전심을 읽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 전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를 드리는 일이다.
예후가 금송아지를 내버려둔 것은 어쩌면 정무적 판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는 ‘유사 신앙’에 타협했던 것일수도 있다. 두가지에 대한 평가는 분명하다. 그는 열심이었지만, ‘전심’이 아니었다.
우리의 타협과 생각의 편협함으로 ‘열심’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전심으로 주님을 선택하는 삶 살기를 간절히 구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