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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유일한 이름 | 사도행전 4:1–12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3 사도들을 붙잡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다음 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우리가 이전에 살펴봣던 것처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궁금해하며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질문하는 사람들과 조롱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어제의 본문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걷고 뛰고 찬양하자 몰려와서 두려워하며 질문하던 사람들과 다르게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온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들은 당연히 다리 못쓰는 지체장애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고,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무슨 이야기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격분’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선전하는 것 때문이었다. 이것은 ‘선포’ 라는 번역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어원은 ‘사자’, ‘천사’ 로 사용되는 앙겔로다. 따라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로써 부활의 증인의 역할을 아주 잘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을 [옥]에 가두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들을 옥에 가둘지언정, 복음은 가둘 수가 없다.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은 어른 수가 오천명이 넘는다.
5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우리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아마도 안나스의 아들이었을 요한, 왕족이었을 거라고 추측되는 알렉산더가 참석해서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기적’을 만들어 냈는가 질문한다. 그들의 의도는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을 제거하려는 수작이다. 베드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경건’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것을 뒤집어, 그들의 ‘경건’이 이 일을 만들어 냈다고 무마시키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행한 것이다. 그들의 이런 속셈은 당연하다.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지워버리든지, ‘사탄의 힘’으로 걸고 넘어지든지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이름을 지워버리려고 시도한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직접 심문하고 십자가에 죽도록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악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기는 커녕 부활의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 자체를 지워버리려고하고있다.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매우 담대하다. 병든이가 낫게 되었느냐는 질문에서의 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지우려고 하는지 핵심을 짚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고 벌였던 ‘십자가’를 다시 주목하고 지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핵심은 그들이 ‘죽인’ 예수 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바로 그분의 이름이 이 사람을 다시 걷게 만들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논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적의 중심과 이유시며,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전의 모든 질서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질서이시기 때문에 이 질서에 반하는 것은 심판을 이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생명과 부활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11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입니다.
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전의 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다’ 그러나, 버림 받은 그 돌은 새로운 질서와 기초로 새로운 집, 새로운 나라를 세우신다. 이것은 그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에게 그 무한한 혜택과 은혜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제외될수밖에 없다.
이 구원의 혜택의 배타성이 ‘이 예수 밖에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이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다른 이름이 없다’ 라는 표현으로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구원 혜택은 새로운 창조와 부활의 능력이다. 이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분께서 제공하시는 실재의 능력이다. 물론 세상의 체계와 질서 속에도 일정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로마의 혜택과 성전의 혜택은 금과 은으로 번쩍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리를 쓸 수 없는 사람이 걷고 뛰는 일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부활’을 전해줄 수 있다. 그 혜택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 중에 반대와 조롱에 맞서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소망임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사자들인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우리에게도 이 유일한 질서 속에 살아가려는 결단과 의지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오직 우리 주님이 제공해주시는 혜택 안에 사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일 것이다. 어떤 조롱과 멸시에도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자랑됨을 보일 수 있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에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