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고, 율법학자들이 그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서는 몹시 놀라, 달려와서 인사하였다.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이 논쟁을 하고있는데, 논쟁의 이유보다 논쟁하고있는 제자들이 먼저 등장함으로써 난처해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제자들은 이미 엄청난 기적들과 가르침으로 전도 여행을 다녔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본문은 그들이 ‘실패’한 모습에 주목한다. 그들의 실패는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전에는 가능했는데, 왜 불가능해진 것일까?
이어지는 문장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왜 온 무리는 ‘몹시 놀라’워했을까? 분명히 무리는 예수님을 매우 긍정적으로 여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랄’ 만한 이유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전의 장면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도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리라고 추측한다면, 이 놀람은 아마도 예수님의 ‘신성’이 어떠한 측면에서든지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제자들도 ‘두려워하며 놀라’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참된 하나님으로써의 기적을 보이시리라 예상될 것이다. 제자들의 실패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들과 무슨 논쟁을 하고 있느냐?”
17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18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한다. 아이는 귀신에 사로잡혀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거품을 흘리게 만들고 이를 갈고 몸이 뻣뻣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이 증상이 ‘간질’과 비슷하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일관되게 ‘영적인 문제’로 설명한다. 이 지점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질병과 영적인 문제가 늘 언제나 결합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늘 언제나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형태가 모두다 가능하다고 생각해본다면, 아이의 간질성 발작 현상을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다 질병을 영적인 문제로 치환할 수는 없다. 마가의 의도 또한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것이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예수님의 꾸지람은 ‘믿음’과 연결된다. 지금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만을 지칭하기에는 ‘세대’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어쩌면 그 무리, 또는 최소한 아이의 아버지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전반적인 이들의 상태가 ‘믿음없음’이다.
믿음없음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는냐고 말씀하시는 것과 결합되어 있다. 결국 참된 믿음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실 상태, 죽음과 부활 이후에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전까지 그들은 계속 실패할 것이고 예수님의 인내는 계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아이를 데려오라고 시키신다. 이것으로 이전에 예수님께서 ‘따로 한적한 곳’에서 행하시던 기적이 점점 매우 공적이고 분명한 치유 사역이 되고 있다.
20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왔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아이에게 즉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다.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셨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22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2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할 수 있으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앞서 살펴본것처럼 질병의 발현은 ‘귀신’이 일으킨 일이다. 예수님은 아이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을 보였는지 질문하신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릴때부터라고 이야기하는데, 설명은 단순히 질병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아이는 ‘불 속’이나 ‘물 속’으로 던져진다. 이것은 귀신이 악의적인 상해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질병’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게 옳다.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 이라는 [의미없는 말]을 지적하시고는 [믿는 사람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못하실 일은 없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크기나 질량을 생각하기가 쉬우나, 본문은 믿음의 ‘대상’에 주목한다. 그들의 믿음이 지금 왜곡되어가고 있음을 앞선 본문에서 살펴봤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참 대상이신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실’ 분이셔야 한다. 그 지점이 언제까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는 말씀으로 지적되었다.
24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25 예수께서 무리가 어울려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26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서,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 아이는 죽은 것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 하였다.
27 그런데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섰다.
아버지는 믿음없음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요청한다. 절규에 가까운 그의 요청의 대상은 ‘예수님’ 이시다.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의 믿음이 지적되었었지만, 이장면에서 믿음 없는 자는 귀신 쫓아내는 자의 믿음의 여부가 아니라 고침받기를 간청하는 아버지의 믿음이 지적된다. 둘 모두가 믿음이 없었다고 지적되므로 축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 일은 결국 고침받기 원하는 자의 믿음이 매우 큰 요소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의 명령은 ‘나가라’ ‘들어가지 말아라’ 라고 간단히 이루어진다. 귀신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나갔고 아이는 죽은것처럼 되었다. ㅇ주변의 사람들이 ‘아이가 죽었다’고 판단할만큼 충격적인 반응이 이어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판단은 아주 쉽게 바뀐다. 아이는 살아서 일어선다. 여기에서 아이가 정말 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리라는 것이 암시되는데,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는 것이 ‘야이로의 딸’ 사건에서도 등장했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예수님은 집 안으로 들어가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질문한다.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속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싶어한다. 분명히 그들은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아닌가?
예수님은 이런 종류, 즉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주신다. 제자들에게는 ‘기도’가 부족하다. ‘기도’의 대상이 올바르게 설정될 때, 기적의 주체는 ‘제자들’이 아닌 ‘기도의 대상’이 일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이 이 장면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하심으로써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믿음’을 달라고 소리 지르며 간절히 요청한 아이의 아버지의 외침은 간절한 ‘기도’ 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놀랄’수밖에 없는, 기도의 대상이심이 분명하다.
우리는 제자들이 성공적인 사역의 첫 단추와 오늘 본문에서의 실패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졌을 수 있다. 기계적인 선언과 치유의 기도가 반복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믿음’, 그 믿음의 ‘대상’에 포커스 맞춰지지 않고 습관적이었을 수 있다. 성공적 사역은 그렇게 제자들의 마음을 무디게 했을 것이다.
사역의 성공적인 원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내가’ 일하려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믿음없는 세대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 오로지 우리의 참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전적으로 의탁하고 의존하는 것만이, 그 간절한 ‘기도’만이 기적의 이유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전적인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오직 예수님임을 고백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