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왕이 온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유월절을 준비하십시오.”
22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도 이와 같은 유월절을 지킨 일은 없었다.
23 요시야 왕 제 십팔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기리는 유월절을 지켰다.
요시야가 지낸 유월절이 짧게 소개된다. 하지만 이 유월절은 매우 독특하게 설명되는데, 사사들의 시대로부터 유다 왕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도 이런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까지 유월절이 아주 없었느냐고 질문한다면 요시야와 가장 가까운 시일인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켰다는 본문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유월절이 다른 어떤 유월절과는 차별화되고 특별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그가 성전에서 찾았던 ‘신명기’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신명기 16장은 유월절이 오직 ‘성전’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명령된다. 그런데 이전 본문에서 살펴본것처럼 모든 산당을 전국가적으로 폐쇠하고 제사장들의 임의적 예배를 막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중앙성소에서 드리는, 전 민족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성대한 유월절은 ‘어느 시대에도 지킨적이 없었다’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요시야의 개혁은 말씀을 기반으로, 독특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된다.
24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주님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지키려고,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없애 버렸다.
25 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요시야는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지속적인 우상숭배 제거 사업을 추진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렇게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말씀이 신명기 6장의 ‘쉐마’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하는 본문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독특한 지위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의 왕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계획된대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26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다에게 쏟으시려던 그 불타는 진노를 거두어들이시지는 않으셨다. 므낫세가 주님을 너무나도 격노하시게 하였기 때문이다.
27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을 내가 외면하였듯이, 유다도 내가 외면할 것이요, 내가 선택한 도성 예루살렘과 나의 이름을 두겠다고 말한 그 성전조차도, 내가 버리겠다.”
28 요시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 에 기록되어 있다.
요시야가 하나님께로 돌이켰음에도 왜 하나님은 심판을 준비하시는가?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가 많으셔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으시는가? 열왕기 기자는 ‘므낫세가 격노하시게 했다’고 되어 있다. 므낫세의 잘못이 아들에게 전가되어 심판을 받는다면 연좌제를 금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 당연히 따라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온것처럼 이미 ‘히스기야’의 시대에 심판은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로 유예되어온 것이다. 심판은 취소된적이 없었다. 다만 그 시간을 은혜로 지연 시키셨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심판 예고는 전국적인 개혁을 실행하는 왕과 상관없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러온 ‘반역’의 일상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것처럼 유다도 버리실 것이다. 심지어 개혁의 시작이고 완성이었던 ‘성전’ 조차도 버리실 것이다. 완벽한 왕이지만, ‘완성된 왕’은 될 수 없다.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29 그가 다스리고 있던 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앗시리아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올라갔다. 요시야 왕이 그를 맞아 싸우려고 므깃도로 올라갔으나, 바로 느고에게 죽고 말았다.
30 요시야의 신하들은 죽은 왕을 병거에 실어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 그의 무덤에 안장하였다. 그 땅의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였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앗시리아의 확장정책에 의해서 이집트와 바벨론이 연합전선을 펼쳤다고 나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앗시리아 세력이 축소되자 이번에는 바벨론이 강대해지면서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연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국제 사회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요시야는 ‘이집트’와 싸우기 위해서 므깃도로 올라갔다가 전사하고만다. 그에게 있어서 형제나라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를 도우러가는 이집트가 배신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명분’만으로는 시대 정신을 뒤집기 어려웠다. 결국 이 전투에서 요시야는 사망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요시야가 죽지않았더라면 유다가 달라졌을까? 분명히 열왕기기자는 그런 인식을 반대한다. 요시야가 죽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심판은 일어났을 것이다. 여호아하스를 시작으로 유다는 급격한 멸망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위대하고 특별한 왕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이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것 같고, 재앙을 막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게 느껴질 수 있다. 성전마저도 파괴하기를 마다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분노는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의 예시라는 점을 생각해봐야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정해졌다. 하나님의 유예된 심판이 임할때 이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성전마저도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 두려운 심판은 인류에게 큰 재앙이다.
그런데 완벽해보이는 왕이 실패한것과 다르게 위대한 인류의 개혁이 새로운 왕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 왕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버림’ 받으셨고, 죽음의 쓴 잔을 받아드셨다. 이것은 완전한 저주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시야, 그 완벽해보이는 왕의 실패와 다르게, 완전한 왕이신 우리 예수님의 개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유월절 양이 되시고, 자기 자신의 성전을 무너뜨리셨지만,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죽음으로 해소하시고 우리와 화해시키셨다.
완벽해보이는 왕 요시야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의 실패와 죽음은 예시일 뿐이다. 오직 ‘완전하신 왕’ 예수님을 기대하게 만드는 그림자다. 우리 인간 세상의 아무리 대단한 것들도 결국 ‘예수님 안에서만 완벽함’을 찾을 수 있다. 오늘 그 완전하신 왕이신 주님을 다시 묵상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