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 쓴 쑥,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잊지 않음은 결코 잊지않으리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울적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이다.
그러나 이 ‘잊지 않음’은 ‘기다림’[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이 고통과 아픔을 갚아주시고 신원하실 것이다. 오로지 그 긍휼을 기다리는 것만이 고통속에 차 있는 화자의 유일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긍휼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주실 것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25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26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것은 고통에 찬 화자는 아침마다 사랑과 긍휼을 기대하고 바란다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 긍휼을 구하지만 그 긍휼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화자가 어떻게 그 사랑과 긍휼을 ‘날마다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이 고백은 ‘경험적 고백으로서의 감탄’이 아니라 ‘의지적 고백’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화자는 계속해서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시며, 모든 희망의 종착이라고 고백한다. 이 의지적 결단이야말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긍휼을 기다리는 자의 태도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과 긍휼을 기다리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여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반드시 그 은혜를 제공해주실 것이다. 따라서 이 ‘참고 기다리는 행위’, 인내야말로 고난받는 자가 할 수 있는 소망의 행위다.
27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고,
28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29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30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31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젊은 시절에 멍에를 짊어지는 것은 앞으로의 살아갈 모든 생애에 고통과 아픔이 따라다니리라는 예측을 가져오기에 매우 불안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멍에를 기꺼이 감당하며 어느 순간에 주실 은총과 희망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바라며 겸손함으로 이 멍에를 지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때리는 사람에게 뺨을 대고 욕을 하는 자의 욕설을 듣는 행위는 우리 본성의 자연스런 반응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럽지 않은 멍에를 기꺼이 매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저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 좌절과 슬픔과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내’ 하는 것은 결코 미련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봐달라는 간절한 호소다.
32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33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34 세상에서 옥에 갇힌 모든 사람이 발 아래 짓밟히는 일,
35 가장 높으신 주님 앞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일,
36 재판에서 사람이 억울한 판결을 받는 일, 이러한 모든 일을 주님께서 못 보실 줄 아느냐?
37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냐? 주님이 아니시더냐?
38 궂은 일도 좋은 일도, 가장 높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셔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
39 어찌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죄값으로 치르는 벌을 불평하느냐?
화자의 말처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다. 긍휼과 사랑으로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 모든 억울한 일들을 알고 보고 듣고 계신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판단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하심은 그 모든 일들에 대한 판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어떤 것도 불평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불만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당하는 억울함조차도 하나님께서 바꾸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도 또한 신실하게 붙들고 의지적으로 고백하고 구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본다. 우리의 힘과 능력은 이 세상에 벌어지는 수만가지의 악과 제대로 싸워 이길 힘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억울한 고통과 아픔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공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능력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힘이므로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과 신음에 찬 호소를 바꾸실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 지금 비록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시간 속에서 그 신원하심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 확실한 보증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므로 젊은 날부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간절히 붙드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듣고 보고 계시며,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을 돌려 대고 저주하는자에게 복을 비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갚아주심을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축복’의 비결이다. 오늘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소망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