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 때에 여리고에서부터 따라 온 예언자 수련생들이 강 건너에서 이 광경을 보고는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 위에 내렸다” 하고 말하면서, 엘리사를 맞으러 나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16 그리고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선생님의 제자들이 쉰 명이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힘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을 보내셔서, 선생님의 스승을 찾아보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영이 그를 들어다가, 산 위에나 계곡에 내던졌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17 그러다가 그들이 하도 성가시게 간청하자, 엘리사는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 쉰 명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찾아보았으나, 엘리야를 발견하지 못하고,
18 여리고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에게로 돌아왔다. 엘리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수련생들은 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내던졌다’ 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의 인상에 분명히 이 사건은 ‘기적’의 사건이 아니라, ‘과학적’ 사건으로 인식되었던게 분명하다. 그들은 철저한 조사를 하고자 했다. 믿기위한 의심과 조사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것을 성경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50명의 수련생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고자 했다는 것은 믿기 위한 의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사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봤음에도’ 믿지 않는다.
50명의 수련생들은 ‘성가실정도’로 간청해서 사흘 동안을 찾았다. 그런데도 찾지 못한다. 엘리사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고 그들의 헛수고도 예상했다. 그들은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않고 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면 믿겠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만난다. 하지만, 정말 ‘기적’을 보면 믿게 될까? 믿기지 않는 현상을 깊이 조사해도 아무 증거도 찾지 못할텐데도 끝없는 의심은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께서도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좋지만, 물이 좋지 않아서,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유산합니다.”
20 그러자 그는 새 대접에 소금을 조금 담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것을 가져 오니,
21 엘리사는 물의 근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소금을 그 곳에 뿌리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맑게 고쳐 놓았으니, 다시는 이 곳에서 사람들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22 그 곳의 물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그 때부터 맑아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현대의 과학적 관점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자도 그런 ‘과학적 평가’를 하지 말라고 이미 50명의 수련생 그룹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땅’과 ‘유산’이 연결되어 있고, [좋지 않은 물]이 원인이 되고 있다. 문자적으로는 ‘땅이 유산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땅’이 유산한다’고 생각할까? 이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암시다.
구약은 ‘자손없음’이 큰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그 중요한 변곡점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해왔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 나오미에게는 아들들 모두 잃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래서 원래는 자녀가 없어야 했다. 그러나 보아스를 통해 룻은 오벳을 낳았고 그가 다윗의 할아버지다. 아이낳지 못하던 한나에게는 사무엘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우유부단함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유산의 땅]이 하나님의 사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고쳐졌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3 엘리사가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올라가는 길에, 어린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보고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고 놀려 댔다.
24 엘리사는 돌아서서 그들을 보고,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곧 두 마리의 곰이 숲에서 나와서, 마흔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였다.
25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갈멜 산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오늘의 마지막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리자 곰이 찢어 죽였다는 한편으로는 웃픈 이야기다. 그러나 원문에서 놀리고 있는 ‘어린 아이들’은 [청소년~ 청년]이다. 그렇다면 분간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원어는 훨씬 더 동네 건달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엘리사를 놀리고 있는 것은 동네 개구장이 꼬마들이 아니다. 훨씬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머리’라는 표현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우리는 엘리야가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된 것을 보았듯이 털이 없는 엘리사는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머리야 꺼져라’ 라는 말은 단순히 놀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경멸과 조롱]이며 그런 자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옳다. 그리고 그에대한 심판은 매우 정확했다. 그들을 찢겨 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