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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어려움과 괴로움을 통과하는 방법 | 디모데전서 1:1-11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2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도됨은 구주이신 하나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생각하면, 자신을 ‘부르신 분’이 누구신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자신을 부르신 분이 누구신지 알았다는 것은 부르신 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소개한다. 그분은 은혜와 자비와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것들 안에서 그의 부름에 따른 삶을 살아야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믿음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다른 구원의 영광을 경험한 자들이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부자관계는 혈연관계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곧 나의 형제, 자매’ 가 되는 것처럼 이 믿음 안에서 ‘살아내는 사람’ 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3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4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5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6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7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던 이야기의 배경은 사도행전 19장 일 것이다. 행19은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마술사들의 엄청난 회심의 사건들과 은장색 드미트리의 소동을 이야기해준다. 에베소는 말씀의 깊은 이해와 더불어 복음에 반응하기 위해 모든 우상들을 없애고 거짓된 미신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어디에도 있었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기독교 가르침이 교회 안에 큰 문제가 되어왔다.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거짓된 복음을 가진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복음의 확실한 가치를 전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신화와 족보 이야기들, 쓸데 없는 변론을 일으키는 것들에 대하여 복음을 온전히 가르치고 전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앞서 인사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은 은혜와 자비와 평화 안에서 그 복음을 ‘살아냄’으로 관계가 증명된다. 증명되지 않은 가르침은 ‘거짓’이고 쓸데없는 토론일뿐이다.
8 우리가 알기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9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10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11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살아낸다면’ 선한 것이다. 율법의 제정 이유를 ‘의로운 사람’이 아닌 ‘죄인’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율법이 ‘죄인’들에게 행동의 제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라서 의로운 사람은 율법의 ‘제어’가 속박이 아니라 가이드라인이므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의 제어’를 ‘속박’으로 느끼는 이유는 ‘죄인’된 사람들의 본능적 반응이다.
바울은 율법제정으로 다양한 죄성들이 제어되어야함을 보여준다. 이 죄의 목록들은 모든 인류의 죄 목록의 ‘완성형’일수가 없다. 오히려 에베소에서, 그 주변에서 경험되었던 실재적인 문제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복음’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이들이며, 이들이 이 죄의 목록들을 버리고 은혜와 자비와 평화 속으로 들어와 그 안에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복음’이 될 것이다.
이 복음의 건전한 교훈이 바로 이 영광스러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선언하는 것이고, 이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은 것이고 곧 ‘사도’로써의 직분이며, 디모데 또한 동일한 주님의 부름에 따라서 동일한 삶을 살고 보여주어야 한다.
‘복음’은 부르신 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재되어야한다. 또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 알아야한다. 그것이 일차적인 부르심의 확인이다. 그리고 그 부르신 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 영광스러운 삶이 추구되는 삶의 모습과 모양이 얼마나 정의롭고, 질서있고, 기쁨과 은혜와 자비 속에 ‘평화로운 삶’인가를 배우고, 가르치고, 살아야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통합된 삶’의 체계다. 부르신 분을 알고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삶이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보람과 만족과 기쁨을 만들어내는 삶이다. 오늘 우리가 그 복음을 살길 소망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죄악된 본성에 따라 살아가고있는가? 복음은 그 본성을 거부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연스럽게 가득차게 만들며 그 속에서 참된 삶의 만족을 경험하게 만든다. 오늘 이 복음이 주시는 만족을 다시 깊이 생각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