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복음때문에 고난을 함께 겪는 것을 회피하지 말라고 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소개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로 얻어지는것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주신 거싱ㄴ데, 이것은 영원전부터 계획되어있었다. 그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났다. 이제 비밀이 없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곧 생명과 썩지 않음을 제공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인 ‘부활’을 얻은 자가 [고난]을 두려워하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이 비밀을 깨달은 자들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인 부활은 ‘내가 믿어 온 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기초되었기 때문이다. 이 확실한 복음의 진리는 ‘그 날’, 곧 확실히 부활을 경험하는 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까지 언제나 확실히 붙들만한 진리다.
바울은 ‘내가 맡은 것’ 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리라고 말하고있는데, 이것이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사명’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리스어는 ‘나의 보증금’, ‘내가 맡겨두어 받게될 것’으로 해석되는데 그렇다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얻게될 확실한 보상인 ‘부활’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디모데는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바울에게 들은 말씀을 어떤 고통 속에도 지키고 수호해야한다. 그것에 대한 보상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부활을 주실것이다.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동역자들은 바울을 버렸다. 우리는 바울의 많은 동역자들이 결국 사역의 길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알고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표현할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라도 그들이 바울에게 괴로움을 준 것은 확실하다. 그 괴로움이 ‘이단’에 빠짐인지, ‘배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선 본문이 진리에 대한 타협과 박해위기 속에서도 용기를 내라는 응원이므로 두가지 모두의 상황이 혼재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긍정적인 예시는 오네시보로다. 오네시보로는 여러번 용기를 주고 옥에 갇혔을때도 열심으로 찾아와 만나고 도움을 주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따라서 이런 도움을 받음으로 복음전하는 일에 막힘이 없었다는 점을 알수있다.
‘그 날에 자비를 내리시길 원한다’는 말은 오네시보로가 이미 죽은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빈 것으로 보인다. 오네시보로는 부활의 때에 그의 봉사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얻게 될 것이다. 바울의 원함은 이 봉사에대한 상급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4장에서 바울 자신도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다고 확신하며 선한 복음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부활은 확실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다. 믿는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부활이 있는한 어떤 고통과 고난도 지나가는 과정이될 뿐이다. 우리가 얻게될 상급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현실에 닥친 위기와 문제가 크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이 부활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제공될 것을 알기에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이 선한 것, 맡겨진 사명에 충성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확실한 소망이 있기를 바란다. 그 소망때문에 우리의 닥친 현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못한다. 주님이 오시는 날, 이 부활의 소망이 확인되는 날, 우리의 분투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될 것이다. 오늘 이 소망을 붙들고 확실한 부활의 삶 살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