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이 대답하였다.
2 아, 내가 겪은 고난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 있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올릴 수 있다면,
3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니, 내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4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
욥이 고통스러움에 차서 호소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욥은 고통의 무게를 잴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다의 모래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많은 수의 백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통이 바다의 모래보다 무겁다고 표현하는 것은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의 무게를 말하고자 하는 것같다.
그런데 그토록 엄청난 고통의 이유는 자신이 당한 고통의 사건들 때문이 아니다. 고통의 이유는 하나님이 ‘화살을 쏘셨고’ ‘몰아치셨기’ 때문이다. 연습용 화살에는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 독을 사용한 화살은 ‘실전’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하나님은 실재로 욥을 매섭게 쏘셨고 때리신다. 이것이 욥이 절망하며 통곡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왜 나를 독화살로 쏘셨고 몰아치시며 두렵게 하시는가?
5 풀이 있는데 나귀가 울겠느냐? 꼴이 있는데 소가 울겠느냐?
6 싱거운 음식을 양념도 치지 않고 먹을 수 있겠느냐? 달걀 흰자위를 무슨 맛으로 먹겠느냐?
7 그런 것들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냄새조차도 맡기가 싫다.
욥은 예시를 든다. 먹을게 없다.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없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시며 먹을 것을 제공하시는 분이시라고 엘리바스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욥에게는 먹을 만한 것이 제공되는게 아니다. 구역질나고 냄새나는 음식들이 제공되고 있다.
욥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자신이 도무지 입에 넣을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소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독화살’과 구역질나고 냄새나는 음식은 몸 속으로 들어와 온 몸을 뒤틀리게 한다는 점을 공유한다. 하나님의 때리심이 욥을 완전히 비틀어놓는다.
8 누가 내 소망을 이루어 줄까?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9 하나님이 나를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깨뜨려 주시면,
10 그것이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고, 이렇게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도 그것이 오히려 내게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11 그러나 내게 무슨 기력이 있어서 더 견뎌 내겠으며, 얼마나 더 살겠다고, 더 버텨 내겠는가?
12 내 기력이 돌의 기력이라도 되느냐? 내 몸이 놋쇠라도 되느냐?
13 나를 도와줄 이도 없지 않으냐? 도움을 구하러 갈 곳도 없지 않으냐?
욥의 소망은 차라리 부숴지고 깨뜨려짐으로 ‘죽는 것’이다. 욥은 죽음을 ‘안식’으로 인식했었다. 욥은 쉬고싶다. 지금의 고통이 끝나고 쉴 수 있는 날 ‘기뻐할 것’이다. 이것이 욥의 소원이다.
욥은 더 버틸 힘이 없다. 여기에서도 욥이 원망하고 고통하는 이유가 선명히 드러난다. 지금 ‘욥’은, 자신을 도와줄 이, 도움을 구하러 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는, 도움을 구하러 갈 수 있는 곳, 하나님이 자신을 독화살로 쏘고 계시며 때리고 계신다. 어디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 완전한 하나님과의 단절이 욥에게 있어 더욱 큰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오고있다.
14 내가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든 말든, 내가 이러한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야말로, 친구가 필요한데,
15 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
16 얼음이 녹으면 흙탕물이 흐르고, 눈이 녹으면 물이 넘쳐흐르다가도,
17 날이 더워지면 쉬 마르고, 날이 뜨거워지면 흔적조차 없어지고 마는 개울.
18 물이 줄기를 따라서 굽이쳐 흐르다가도, 메마른 땅에 이르면 곧 끊어지고 마는 개울.
19 데마의 대상들도 물을 찾으려 했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 개울에 희망을 걸었지만,
20 그들이 거기에 이르러서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 개울에 물이 흐를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하였다.
21 너희가 이 개울과 무엇이 다르냐? 너희도 내 몰골을 보고서, 두려워서 떨고 있지 않느냐?
14절은 친구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무너져있는 한 인간의 상태를 친구가 일으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친구들의 ‘동정’ 즉, 헤세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헤세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보호하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는 단어다. 사무엘상,하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헤세드’로써 서로에게 충성했다는 것을 나눴었다. 다시말해 친구 사이의 헤세드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자비를 베푸는 역할이다. 그렇다면 그로써 하나님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지금 엘리바스의 말로써 확인되는 것은 그들이 ‘종교성’을 가지고 종교적 정답은 말하지만 ‘헤세드’는 없다는 것이다.
욥은 와디 지형은 설명하면서 친구들이 그런 존재라고 실망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와디는 욥이 설명하는 것처럼 비가 올 때, 얼음이 녹거나 눈이 녹으면, 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넘치는 강이 되지만, 메마른 계절이 오면 완전히 평지가 되버린다. 욥의 지적은 욥이 ‘부자이고 완전할 때’는 친구처럼 굴다가, 욥이 완전히 무너져버리자 곧바로 ‘비판자’로써 돌변하는 것에 대한 실망이다. 그들은 ‘일관성’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없고 상황에 따라 변질되어버린다.
22 내가 너희더러 이거 내놓아라 저거 내놓아라 한 적이 있느냐? 너희의 재산을 떼어서라도, 내 목숨 살려 달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23 아니면, 원수의 손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하길 했느냐, 폭군의 세력으로부터 나를 속량해 달라고 부탁하기라도 했느냐?
24 어디, 알아듣게 말 좀 해 보아라. 내가 귀기울여 듣겠다. 내 잘못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25 바른 말은 힘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희는 정말 무엇을 책망하는 것이냐?
욥이 바라는 것은 재기할 수 있는 돈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이나 적들에게 복수하는 일 따위가 아니다. 그런 실행력은 원하지 않는다. 그렇것들을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욥이 바라는 것은 위로의 말일 것이다. 욥도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그 말은 ‘종교적 정답’이 아니라 헤세드로 가득찬 말이다. 사랑과 충성으로 직언하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다. 삶을 바꾸게 만드는 힘있는 말이다. 그러나 욥이 느끼기에 엘리바스의 말은 의미없는 ‘책망’, 잔소리였다. 왜냐하면 그 말이 사실이더라도 ‘헤세드’가 없었기 때문이며, 존중과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포인트’를 잡고있지 못하다. 지금 욥은 분명히 이유없는 고통을 당하는 중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자꾸만 이유를 만들어낸다. 욥의 고통에는 영적인 이유, 사탄의 간계가 있지만, 친구들은 ‘영적 존재’의 실존에 대해 관심이 없고 지금 이순간에 벌어진 ‘상태’만 보고있다. 친구들은 포인트를 잡지 못한채 애꿎은 말들로 욥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중이다.
26 너희는 남의 말 꼬투리나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말이란, 바람과 같을 뿐이 아니냐?
27 너희는, 고아라도 제비를 뽑아 노예로 넘기고, 이익을 챙길 일이라면 친구라도 서슴지 않고 팔아 넘길 자들이다.
28 내 얼굴 좀 보아라. 내가 얼굴을 맞대고 거짓말이야 하겠느냐?
29 너희는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더 돌이켜라. 내 정직이 의심받지 않게 해야 한다.
30 내가 혀를 놀려서, 옳지 않은 말을 한 일이라도 있느냐? 내가 입을 벌려서, 분별없이 떠든 일이라도 있느냐?
여기에서 친구들의 잘못을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친구들은 ‘정답’을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답’ 속에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친구들의 위로의 방문이 선한 의도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음에도, 그 목적이 과연 정말 모든 것이 ‘선의’로만 이루어졌는가도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현상’에만 관심있으므로 ‘정답’을 ‘현상’에 끼워맞출 뿐이다.
그들이 관심있는 현상, 지금의 상태만 중요하다면 그들은 어떤 신실함도 없이 돌변할 수 있다. 심지어 고아라도, 노예로, 친구라도 팔아버릴 것이다. 그들은 욥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얼굴을 맞대고 있음에도 참으로 듣지 않는다.
욥은 친구로써의 역할을 호소한다. 정직이 의심받지 않도록 들어주고 증인이 되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러려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현상’만 본다. 욥은 저주받은 ‘현상’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욥의 ‘현상’을 보고 ‘종교적 정답’만 읊조릴 뿐이다.
무죄한 욥의 절규와 절망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울리고 있다. 그런데 욥의 고통의 이유가 ‘신실하지 못한 것들’로 채워져있음을 발견한다. 친구들이 신실하지 못하다. 또한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하시다고 느끼고 있다. 친구들에게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어떤가? 이 단절로 인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무게가 엄청나다고 호소한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원한 것같은 단절이 욥을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원망하는데서 끝났다면 욥의 잘못은 선명하다. 그러나 욥은 고통중에 몸부림치며 원망과 절규의 토로를 하나님께 날 것 그대로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끝까지 붙들려고 몸부림친다.
우리는 이런 욥의 태도를 생각해봐야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나를 과녁으로 삼고 독을 주입하시는 것 같으며 먹을 것이 아니라 먹지도 못할 것들로만 제공되는 인생의 여정 한 페이지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무죄한 자이심에도 당하신 그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지시고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침내 우리 하나님의 헤세드가 우리 주님을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헤세드가 반드시 임하리라 믿는다. 우리 또한 그 헤세드, 끝까지 신실함으로 하나님만을 붙들며 호소할 수 있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포인트
1.
욥의 진짜 고통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로부터 왔다.
2.
친구들의 헤세드 없음이 그들의 진짜 정체를 보여줬다.
3.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완전한 단절은 바로 우리 때문이었다.
4.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우리는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잡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