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였다.
2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 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구나.
3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4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욥은 자신의 인생이 그저 바람같다고 말했다. 빌닷은 욥에게 그런 원망의 이야기가 오히려 거센 바람같다고 말한다. 욥의 말이 거침없이 쏟아내기만하지 알맹이가 없는 말들이라는 비난이다.
빌닷의 이야기에 대한 핵심은 이전의 엘리바스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의 대한 대가’ 이다. 심판을 보면 ‘죄’가 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빌닷에 의하면 욥의 자녀들의 죽음은 ‘죄’의 결과다. 이것은 욥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욥조차 자녀들이 혹시라도 지었을 죄에 대해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들의 죽음이 ‘죄’와 연결된다면 지금 욥의 고난도 동일하게 ‘죄’ 때문이 성립할 것이다.
이런 적용이 매우 가혹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고있다. 지금 고통의 원인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빌닷의 표면적인 이야기의 지적은 효과적으로 욥을 때렸을 것이다.
5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6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7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빌닷의 조언은 엘리바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자비를 구하면, 하나님의 회복과 도와주심을 경험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고 사랑하는 말씀인 7절의 말씀처럼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는 적용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빌닷의 이 이야기에서 지적하게 되는 것은 ‘욥의 죄’와 ‘고난’이 전혀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에 욥이 무엇을 회개해야 회복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친구들의 지적은 겉으로만 보이는 현상을 잘못된 원인과 연결시켜서 너무 쉽게 일반화 시켜버린다.
그러나 빌닷 논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빌닷의 의도 자체는 욥을 훈계하고 교훈함으로써 그를 다시 일으키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선한 의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옳지 못하고, 친구를 향한 ‘헤세드’를 잃어버린 왜곡된 정답을 밀어붙일 때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괴로움이 더욱 크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8 이제 옛 세대에게 물어 보아라. 조상들의 경험으로 배운 진리를 잘 생각해 보아라.
9 우리는 다만 갓 태어난 사람과 같아서, 아는 것이 없으며, 땅 위에 사는 우리의 나날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10 조상들이 네게 가르쳐 주며 일러주지 않았느냐? 조상들이 마음에 깨달은 바를 말하지 않았느냐?
11 늪이 아닌 곳에서 왕골이 어떻게 자라겠으며 물이 없는 곳에서 갈대가 어떻게 크겠느냐?
12 물이 말라 버리면, 왕골은 벨 때가 아직 멀었는데도 모두 말라 죽고 만다.
13 하나님을 잊는 모든 사람의 앞길이 이와 같을 것이며,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소망도 이와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빌닷은 전통에 호소하며 자신의 주장을 옛 세대로부터 전달받은 지식을 토대로 주장한다. 왕골이나 갈대는 물이 있는 곳에서만 자랄 수 있는데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식으로하면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악을 행하면 벌을 이라는 단순한 지식은 그 문장 자체로 놓고 보았을 때 결코 틀린말이 아니다. 우리는 시편 1편에서 시절을 좇아 열매맺는 나무는 시냇가에 심겨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속적인 물의 공급이 생명을 지속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선함이며 순종이고 은헤다. 계속해서 지적하는 것처럼 친구들의 말들 속에는 진리와 진실이 함양되어 있다. 다만 무리한 일반화를 통해서 왜곡된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14 그런 사람이 믿는 것은 끊어질 줄에 지나지 않으며, 의지하는 것은 거미줄에 지나지 않는다.
15 기대어 살고 있는 집도 오래 서 있지 못하며, 굳게 잡고 있는 집도 버티고 서 있지 못할 것이다.
16 비록 햇빛 속에서 싱싱한 식물과 같이 동산마다 그 가지를 뻗으며,
17 돌무더기 위에까지 그 뿌리가 엉키어서 돌 사이에 뿌리를 내린다고 해도,
18 뿌리가 뽑히면, 서 있던 자리마저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고 모르는 체할 것이다.
19 살아서 누리던 즐거움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고, 그 흙에서는 또 다른 식물이 돋아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반석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의 비유, 씨가 뿌려진 밭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욥이 회개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원망하며 쌓아올리는 집은 하나님께서 삶의 토대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거미줄 처럼 나약한 실, 오래 버티지 못할 집, 돌무더기에 뿌리내린 식물 같을 것이다. 빌닷은 든든한 토대 위에 인생과 즐거움이 세워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온전하고 단단한 토대 위에 삶을 건설하기 위해서 ‘회개’ 해야한다. 그렇지 않은 채 성공하는 것은 곧 사라져버릴 즐거움을 획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욥이 바로 그렇게 했다는 우회적 비판이기도하다. 결국 욥의 원망의 근저에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은 신앙이 들어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0 정말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 손 잡아 주지 않으신다.
21 그분께서 네 입을 웃음으로 채워 주시면, 네 입술은 즐거운 소리를 낼 것이니,
22 너를 미워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악인의 장막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빌닷은 다시 논의를 정리하면서 온전한 사람에게 복을, 악한 사람에게 징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논리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그러면서 참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었을 때 웃음과 즐거움이 다시 되찾아지리라는 이야기를 붙이면서 속히 회개하라는 권면을 전한다.
빌닷의 말을 반면교사로 배워야할 한 가지를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옛 세대’에 두면서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전통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은 매우 중요한 지식 전달의 매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통은 필연적으로 전달에서 오류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달의 매개자인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오류를 저지르는 오염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바스나 빌닷의 경우만 보더라도 옳은 이야기일지라도,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부정확한 인간의 지식이 잘못된 교훈, 잘못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우리의 근거를 두어야하는가에대해 역설한 빌닷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빌닷 스스로는 ‘옛 세대’의 이야기, 전통에 근거를 두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메마른 시내이며 돌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바에 따라 우리의 근거와 기초가 오로지 십자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오류에 대해서 긍정하며 오로지 부활의 영광이 확인된 것으로 증명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겸손을 요구하며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진리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한계는 언제나 옳고 틀림의 기준에 대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참된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된 지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의 영광,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얻어지는 구원이다. 이것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십자가 진리 위에만 있어야 하는 줄 믿는다. 전통은 우리의 토대가 될 수 없다. 참된 진리 위에 바로 서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빌닷의 말은 전통을 근거로하고 있다.
2.
전통은 오류를 범하는 인간에 의해서 진리를 오염시킬 수 있다.
3.
참된 진리는 변하지 않는 사실 위에 세워져야한다.
4.
십자가와 부활만큼 단단한 진리의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