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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복음과 확신 / 사도행전 14:1–18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그래서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많이 믿게 되었다.
2 그러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다.
3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한다. 그리고 많은 회심자들이 나와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계속해서 살펴본것처럼 반대자들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제 유대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방해할 것이다. 이들은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만들었다. 여기에서의 믿는 형제들은 새신자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 라고 표현한다. 사실 누가는 사도를 엄밀하게 열두 제자에게만 사용했다. 그리고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는 곳도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는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묘사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울이 정말 사도와 같은 역할을 너무나 충실히 잘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말함으로써 은혜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4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더러는 유대 사람의 편을 들고, 더러는 사도의 편을 들었다.
5 그런데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그들의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죽이려고 했다.
6 사도들은 그것을 알고, 루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하였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줄곧 복음을 전하였다.
도시는 둘로 나뉜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적극적으로 비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방에 이방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아마도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깨드리는 자들로, 이방인들에게는 로마의 황제에 대한 반역자들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결국 이고니온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돌로 쳐죽이려고 한다.
점점 반대의 수위가 높아져가면서 두 사람은 루스드라와 더베 그 근방으로 피한 후 그 근방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루가오니아 지방에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지만 몇개의 도시들이 더 여정가운데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측된다. 이 다른 도시에 대한 선교 역시 상당한 열매와 반대가 동시에 일어났을 것이다. 다음에 등장하는 루스드라는 집단의 반응이 어떻게 극명하게 변하고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일뿐이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되어서, 걸어본 적이 없었다.
9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
10 큰 소리로 “그대의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루스드라에는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부터 못 걷는 사람에 대한 설명의 언급은 베드로와 요한이 행했던 성전 앞 기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목해서 보았다’ 라는 점이다. 이 사람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바울은 아마도 헬라어로 말하고 있었을 것이고 루가오니아 말이 아닌 헬라어이지만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으리라는 것도 추측해볼 수 있다. 어쨌든 이 사람에게는 고침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이전의 기적에서도 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체자가 곧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소개, 복음의 선포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할 때, 그분의 나라에서 일어나게 될 혜택이 수여된다는 점이 분명하게 지적된다.
11 무리가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서, 루가오니아 말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왔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리고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기 때문이다.
13 성 바깥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성문 앞에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무리는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왔다’고 소리지른다. 여기에 배경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 지역 전설에 따르면 타르쿤트와 런트라는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그 지역을 두루 다녔는데 아무도 그 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오직 나이든 한 부부만이 가진 것들을 나누어주게 되었는데 이 두 신들은 부부에게 보상하며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두 부부를 신성한 나무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심판해버린다.
그러니까 무리가 바울이 행한 일을 보고서 그 지방 언어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왔다’ 라는 말은 그 전설이 재현되고 있다는 말이며, 제대로 대접하지 않을 경우 생기는 저주와 심판을 상상했다는 말이 된다.
이제 그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부르면서 그들에게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 바나바와 바울이 루가오니아 방언을 잘 몰랐기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행동을 방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히 루스드라는 발전된 도시였고 공용어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체장애인의 경우처럼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도시 전체가 소란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한쪽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 사람과 일행이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4 이 말을 듣고서,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는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외치면서,
15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이방 민족들이 자기네 방식대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18 두 사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사하지 못하게 겨우 말렸다.
우리는 15,16절의 이야기와 로마서 1장을 참고해서 논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바울의 설명을 추려보면 이렇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자기네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셨다. 그 이유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에대한 ‘감각’을 모든 인류에게 주셨고, 그 감각에 따라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긴하지만 각자의 방식대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일반은총’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방인들은 ‘일반은총’과 그에 따른 인간으로써 마땅히 느끼는 도덕률에 따라서 스스로 심판하고 정죄하며 ‘인간답게’ 사는 것을 인지한다. 이것을 이미 내재되어 있는 도덕으로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완성된 상태’도 아니며 ‘완전’할수가 없다. 인간의 한계가 그 모든 원리를 파악하는 것은 오염된 인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신 복음’이 있다. 따라서 일반적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방식을 뛰어넘어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셨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설명에 따라서 일반은총이 가지고 있는 효력과 한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이 ‘신적 존재’에 대한 인식과 그 신적 존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이미 내재되어져있는 ‘본능’과 관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 않아서 참된 하나님을 알고 파악하는데는 현저히 부족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복음 속에서만 참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복음은 또 다시 두 가지 반응을 만들어낼 것이다. 받아들이는 자들과 거부하고 박해하는 자들이다. 돌을 들어 치려고 했던 자들은 이제 그 시도를 성공하게 될 것이다. ‘사도’ 들은 위험과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가 두 사람의 선교를 막을 수는 없다. 선명하고 분명한 복음은 세상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심판받지 않는다. 오직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심판받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두려워했던 심판은 전혀 다른 방식, 정말 참 하나님께서 참 인간으로 오신 것을 거부한 것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두려움이 없어야겠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어떠한 요소도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요소가 될뿐이다. 우리는 마침내 부활하게될 소망이 있지만 반대자들에게는 결코 그 위로와 소망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 말씀 묵상하면서 복음에 대한 담대함과 용기가 우리의 주저앉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