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시리아 왕 벤하닷이 또다시 전군을 소집하여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25 그들이 성을 포위하니, 사마리아 성 안에는 먹거리가 떨어졌다. 그래서 나귀 머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에 거래되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이 은 다섯 세겔에 거래되는 형편이었다.
엘리사를 포위하던 시리아의 군사들은 이제 사마리아를 포위하게 된다. 사마리아 성은 먹거리가 떨어지고 물가는 폭등해서 말도 안되는 가격에 먹을 것, 연료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어제 함께 살펴본것처럼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는 풍성함과 나눔, 먹을것으로 풍족한 잔치가 벌어지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의 영향력이 가득했던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셨. 이후 본문에서 확인되지만, 왕은 이 사건의 시작점을 ‘엘리사’ 라고 지목한다. 엘리사가 문제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왕은 자신의 잘못, ‘우상숭배’에 대한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전혀없다. 그런 이스라엘에 풍족함이 경험될리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에, 하나님께서 다시금 땅을 다스리실 때, 풍요로움이 급격히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26 어느 날 이스라엘 왕이 성벽 위를 지나가고 있을 때에, 한 여자가 왕에게 부르짖었다. “높으신 임금님,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
27 왕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돕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부인을 도울 수가 있겠소? 내가 어찌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가져다 줄 수가 있겠소, 포도주 틀에서 술을 가져다 줄 수가 있겠소?
28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오?” 그 여자가 말하였다. “며칠 전에 이 여자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오늘은 네 아들을 잡아서 같이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 하였습니다.
29 그래서 우리는 우선 제 아들을 삶아서, 같이 먹었습니다. 다음날 제가 이 여자에게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 하였더니, 이 여자가 자기 아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2-4장 내용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땅을 정복하시고, 그 땅의 거민들에게 생명과 풍족함을 허락하신다고 지적했었다. 그리고 팔려갈뻔했던 예언자 수련생들의 아들들을 기름을 팔아 살게 만들었던 장면,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주시고 다시 살려주셨던 장면 등에서 약속의 땅은 생명과 미래가 허락된 땅이라고 나눴었다.
그런데 오늘의 장면은 ‘미래’가 잡아먹히는 끔찍한 현상을 보여준다. 왕은 ‘주님께서’ 돕지 않으시는데, 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가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주인 ‘바알’ 때문이다. 바알은 곡식과 포도주 틀에서 풍성함을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의 신이지만, 그 거짓 신을 섬기는 대가는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끔찍한 심판이다. 그의 뉘우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핑계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바알에게 돌리려한다.
문제는 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을 잡아먹는’ 끔찍한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극심한 기근과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적의 군대로 에워싸여있는 극심한 공포심이 이들을 정상적 사고가 가능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차피 미래는 없으니’, 오늘이라도 배를 채우자 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 비극적 상황에서 아이들은 다만 ‘소비’ 된다. 미래가 잡아먻히고 있다.
30 왕은 이 여자의 말을 듣고는, 기가 막혀서 자기의 옷을 찢었다. 왕이 성벽 위를 지나갈 때에 백성들은, 왕이 겉옷 속에 베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31 왕이 저주받을 각오를 하고 결심하여 말하였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대로 붙어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 위에 더 벌을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다.”
32 그 때에 엘리사는 원로들과 함께 자기 집에 앉아 있었다. 왕이 전령을 엘리사에게 보냈다. 그 전령이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살인자의 아들이 나의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전령이 오거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를 보내 놓고 뒤따라 오는 그 주인의 발자국 소리가 벌써 들려 오고 있지 않습니까?”
33 엘리사가 원로들과 함께 말하고 있는 동안에, 왕이 엘리사에게 와서 말하였다. “우리가 받은 이 모든 재앙을 보시오. 이런 재앙이 주님께로부터 왔는데, 내가 어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다리겠소?”
왕은 이 문제를 엘리사에게 돌리려고한다. 엘리사는 희생양이 되어서 대신 죽어야한다. 그를 죽임으로써 민심을 모으고 해결책을 찾을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엘리사는 이런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전 장면에서 시리아의 전략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엘리사와 적대적 세력 이라는 구도 속에서 시리아와 에스라엘 왕은 동일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땅에 폭력을 가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침략하려하지만, 그 모든 계획은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서 컨트롤되고 있다.
엘리사는 이미 사신이 오고 있고 뒤따라 왕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시급한 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며 ‘왕’이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안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엘리사가 군대의 작전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급격한 이스라엘 왕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지만, 그의 본심이 하나님께 충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왕은 다만 ‘전략적 혜택’만 누리려고 하는 철저한 기회주의자라는 사실이 더 돋보이게 될 뿐이다.
왕은 엘리사에게 와서 이 재앙이 ‘주님’께로부터 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건은 이 문제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 이시며, 하나님께 불복종하는 왕이 진짜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더욱 밝히 보여줄 것이다.
1 엘리사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내일 이맘때 쯤에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사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2 그러자 왕을 부축하고 있던 시종무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비록 주님께서 하늘에 있는 창고 문을 여신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당신은 분명히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것이오.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마리아의 물가가 급격하게 안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시종무관은 그런일이 하늘에 있는 창고 문을 여신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전쟁 상황 에서의 승리가 완전히 배제된 계산이다. 그들은 전쟁 상황을 결코 낙관적으로 보고있지 않다. 그저 희생양을 만들고 그를 죽이고 민심을 모으고 다른 비굴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 뿐이다.
엘리사는 그 시종무관에게 그 일을 ‘보기는 하지만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전 본문에서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이 먼 상태로 사마리아에 왔던 시리아 군인들의 이야기를 나눴었다. 마찬가지로 시종무관은 눈을 뜨고 있지만 참된 실재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가 경험하는 거짓된 실재는 전쟁의 위기를 쉽게 탈출하기 힘들것이라는 판단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들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심각한 영적 부패가 ‘미래’ 세대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이런 현상은 실재로 인육을 먹는 행위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서도 ‘미래’ 세대를 잡아먹는 끔찍한 착취가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청년 세대가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끝없는 심리적, 경제적 폭력은 그 미래세대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런 미래세대를 잡아먹는 행위가 본질적으로는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 우리로하여금 소름끼치게 만드는 부분인것 같다. 우리는 풍요의 신을 섬기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미래를 잡아먹고 있다. 그러나 참된 풍요로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풍요로움은 미래를 잡아먹는게 아니라, 미래가 ‘허락’ 됨으로 경험된다. 그분이 허락하실 때, 참된 풍요로움이 경험된다.
오늘 본문 묵상하면서 이 시대의 잘못된 탐욕적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참된 풍요를 경험하기 위해 미래가 허락되기를 구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