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님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셨다.
2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3 그 때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을 촉구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에 걸맞는 욥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그런 주권을 행사할 지혜가 있는지 질문하신다. 욥은 재빠르게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며 입을 다문다. 욥이 하고자 했던 질문과 답변은 이미 하나님의 주권 선언 앞에서 무효화 되었다. 욥이 몰랐던 것이 아니다. 욥은 다만 답변을 구했고 답이 떨어졌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응답은 더욱 강력한 우주적 세계로 뻗어나간다. 욥은 우주적인 고통과 악의 괴물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6 그러자 주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다시 말씀하셨다.
7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8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9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
폭풍과 천둥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비난의 판결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욥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욥이 했던 실수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데 왜 고통을 주시느냐는 질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주권이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욥은 분명 그 주권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르게 고백하지 못했다.
한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과 상관없이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렸었다. 하나님께서 답변하신 순간 욥이 해야 할 일은 사라졌다. 욥이 바라던 일이 이뤄진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은 매우 훌륭하게 긍정적일 것이다.
10 어디 한 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11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12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13 모두 땅에 묻어 보아라. 모두 얼굴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어 보아라.
14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
하나님은 욥에게 악인들과 교만한 자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질문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악과 혼돈과 공허에 대항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연결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교만과 악에 대해 싸우실 것이다. 이 싸우심은 강력한 통치행위이며 어떤 것도 꺾을 수 없고 대적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의 행위이다. 욥은 그런 악의 근원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15 베헤못을 보아라. 내가 너를 만든 것처럼, 그것도 내가 만들었다. 그것이 소처럼 풀을 뜯지만,
16 허리에서 나오는 저 억센 힘과, 배에서 뻗쳐 나오는 저 놀라운 기운을 보아라.
17 꼬리는 백향목처럼 뻗고, 넓적다리는 힘줄로 단단하게 감쌌다.
18 뼈대는 놋처럼 강하고, 갈비뼈는 쇠빗장과 같다.
19 그것은, 내가 만든 피조물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 내 무기를 들고 다니라고 만든 것이다.
베헤못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이 괴물의 모습은 허리와 힘의 강력한 힘과 기운, 길고 커다란 꼬리, 강력한 넓적다리, 강력한 뼈대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매우 강력한 괴물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하마’를 생각하기도하는데, 이 본문에서 갑자기 ‘하마’가 등장해서 하마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서 ‘으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하마가 하나님의 무기를 들고 다니라고 만드셨다는 설명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피조물 가운데서 ‘으뜸’이다 라는 표현을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만들어진 피조물은 창세기적 표현에 따르면 ‘혼돈과 공허’ 일 수 있다.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1절의 말씀 바로 뒤에 등장하며 혼돈과 공허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신다고 함으로써 제어되는 존재로써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혼돈과 공허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관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창세기적 표현의 일관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헤못과 41장에 등장할 리워야단은 혼돈과 공허를 상징하는 우주적 괴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우주적 괴물의 약동이 제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20 모든 들짐승이 즐겁게 뛰노는 푸른 산에서 자라는 푸른 풀은 그것의 먹이다.
21 그것은 연꽃잎 아래에 눕고, 갈대밭 그늘진 곳이나 늪 속에다가 몸을 숨긴다.
22 연꽃잎 그늘이 그것을 가리고, 냇가의 버드나무들이 그것을 둘러싼다.
23 강물이 넘쳐도 놀라지 않으며, 요단 강의 물이 불어서 입에 차도 태연하다.
24 누가 그것의 눈을 감겨서 잡을 수 있으며, 누가 그 코에 갈고리를 꿸 수 있느냐?
이 우주적 괴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모습이 매우 목가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어떤 변화나 일상성 속에도 이 괴물은 몸을 숨기고 그 속으로 들어가 산다. 우리는 물론 늪에 사는 동물의 현실적 모습, 특히 하마의 습성과 관련해서 본문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실재적인 표현이 오히려 혼돈과 공허의 일상성을 보여준 것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그랬을 때,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혼돈과 공허의 속성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욥에게 바로 그 일상 속에 벌어지는 혼돈과 공허의 성질을 눈을 감겨 잡고, 코에 갈고리를 꿰어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당연히 욥은 그런일을 할 수 없다. 욥이야 말로 일상에 날벼락을 맞아 혼돈과 공허를 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을 반대로 듣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상 속에서의 혼돈과 공허를 제어하시며 다스리시고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모든 혼돈과 공허의 본질을 꿰뚫으시며 다스리시고 제어하실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는 실수를 하곤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울부짖음조차 듣고 계시며 얼마든지 응답하신다. 하나님을 찾기만 한다면 말이다. 오늘 우리의 일상에 내제되어있는 모든 악과 고통의 근원조차 알고 계시고 다스리시며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삶을 신실하게 다스려주시길 구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2.
인간의 한계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3.
하나님을 향해 사랑으로 매달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기꺼이 응답하신다.
4.
십자가는 바로 그 사랑의 표현이며 혼돈과 공허를 다스리셨다는 승리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