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QT] 가시 채찍을 붙들며 / 사도행전 26:1–18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 바울이 손을 뻗치고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2 “아그립바 임금님, 오늘 내가 전하 앞에서 유대 사람이 나를 걸어서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변호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 그것은 특히 임금님께서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모두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내 말을 끝까지 참으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왕이기 때문에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하는 바울의 언급은 적절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베스도가 아그립바를 이 심문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리스적 사고’를 하고 ‘로마 법’을 이해하는 인물 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아그립바는 양쪽 세계의 법과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바울은 로마법에서는 고발할 문제가 없다는 것이 천부장과 벨릭스, 베스도에 의해서 차례로 인정되었다. 모두 기독교 기본 진리인 ‘부활’과 관련된 문제, 거짓말로 고발된 율법과 성전에 대한 문제였다. 그것이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만들어내는지, 그것을 모독한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서 밝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변론해야 할 것이었고, 바울은 아그립바가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4 내가 젊었을 때부터 살아온 삶을 모든 유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내가 내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5 그들은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으므로, 증언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6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7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하, 나는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유대 사람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8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십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문제가 유대교 율법과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자신이야말로 유대교 안에서 뿌리깊게 살아온 자라고 자신있게 소개한다. 오히려 고발하는 자들이 오래 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사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아주 담대하게 자신이 소개하고 있는 ‘부활’이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밝힌다.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부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이 약속한 내용의 성취가 곧 ‘부활’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율법의 ‘완성’ 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이 증면된 사건이 ‘부활’이라고 똑똑히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그 ‘부활’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서 자신을 고발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모순이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율법을 지켜도 부활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다.
9 사실, 나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0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그 일에 찬동하였습니다.
11 그리고 회당마다 찾아가서, 여러 번 그들을 형벌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으므로, 심지어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스데반 사건 외에 어떤 핍박의 사건이 있었는지 다 알지 못한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권한으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고 죽임당할 때 찬성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연 산헤드린이 직접적인 사형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누가에 의하면 스데반 사건 또한 분노로 폭주한 무리들이 벌인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오늘 바울의 말은 ‘과정적 수사’ 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정말 그런 죽이는 일이 있었다면 지금 바울의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즉, 거짓말로 모함하여 제거하거나 몰래 음모를 꾸며서 죽이는 일 등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자신이 그런 방식의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울이 회당마다 찾아가서 형벌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는 일도 예루살렘, 유대 지역 뿐만 아니라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행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만 다마스쿠스의 일만을 알고 있지만 더 많은 도시에서 그런 일들을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확하게 복음의 전도자의 삶의 역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이방지역을 향해 박해를 가하던 자가 거꾸로 이방지역, 사마리아, 예루살렘, 다시 로마를 향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12 “한번은 내가 이런 일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13 임금님, 나는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에서부터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14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5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바울은 세 번째 자신의 회심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이전의 장면 설명과 비교했을 때 더욱 자세하게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히브리’ 말로 전해졌으며,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프다는 말씀이 추가적으로 드러난다. 가시돋친 채찍을 발로 찬다는 말은 자신이 잘못된 쪽에 서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시 채찍을 ‘발로 차면’ 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가시 채찍’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러핟면 ‘가시 채찍’은 긍정적인 물건이다. 가시가 보여주는 그리스적, 유대교적 여러가지 상징들이 있다. 가시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요소지만, 진리를 알게 해주는 신비로운 식물이다. 이방 요소에서는 길가메시가 진리를 찾을 때 ‘가시’를 손에 쥐고 돌아오는 장면이 등장하고, 유대교적 요소에서는 가시 떨기 나무를 생각할 수 있다.
고통은 진리를 매개하는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처음에 그 고통을 가져오는 질문과 씨름하지 않고 거부해버리려고 했다. 그것이 부활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가시 돋친 채찍, 고통스럽지만 확실한 진리를 걷어차지 말고 붙들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그 가시에 직접 찔리시고 고통하심으로써 부활의 진리를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16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7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18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의 만남에 숨겨진 대화의 내용들이 속속 밝혀진다. 이미 예수님은 이 만남 속에서 ‘증인’이 되어야 할 것과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시겠다는 계획을 보여주신다. 이전의 장면들에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할 일이 밝혀지게 될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바울은 이미 그 이전에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혼자서 이 환상을 보고 알게 되었을 때와 교차 검증된 상태에서 동일한 말씀을 들었을 때 들게 되는 확신의 깊이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바울의 경험은 진실하다.
그렇다면 바울의 경험의 진술이 왜 이런 차이들을 가져오는 것일까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누가의 의도된 수사적 장치일 수 있다. 세 번의 경험 진술을 통해서 이 사건이 ‘진실’ 이었음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점점 분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점진적 요소’를 둠으로써 성경의 진리가 점차 ‘성취와 완성’을 향하여 가듯이, 바울의 경험과 사역도 점진적으로 성취와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 말씀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구약의 점진적 완성의 결과셨다는 사실과 바울의 사역 또한 점진적 약속의 성취 결과 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 과정은 가시를 쥐는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 경험이 매개가 되어 진리와 부활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또한 살펴보았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 점진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십자가 라는 ‘가시’ 그러나 진리를 붙드는 삶이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복음이 우리 삶에 드러나길 소망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