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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의 시작

생성자
성경
창세기
묵상 날짜
2026/01/07
본문
창 4:1-26
창 4:1-26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와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인을 낳습니다. 여기에 아담의 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와의 말은 이 아들이 뱀의 머리를 부숴뜨릴 아들이 될 것인지에 대한 작은 기대 내지는 아들을 만들어냈다는 기쁨과 만족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뒤 이어 가인의 동생 아벨이 태어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로,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 설명됩니다. 때로 떠돌아다님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민과 정착하는 농경사회의 충돌로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런 내용을 생각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둘은 다른 방식으로 먹을 것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립니다. 앞서 하나님은 땅에서 밭의 채소를 얻어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도 알맞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첫 새끼 양과 기름으로 드린것이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으셨다는 것의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 이유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받으셨는지에 대해서 ‘모른다’고 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달려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도, 아벨의 예배도 받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문제는 인간편에서 그것을 ‘자신의 기호’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나의 ‘선과 악’의 기준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하나님을 판단하는 기준이 자신 안에 생긴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분하며 안색이 변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왜 화를 내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얼굴이 ‘떨어졌는가?’ 라는 질문은 침울하고 마음이 상한 상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일을 할 때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어올릴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얼굴을 다시 들어올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 감정과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올바르지 못한 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침울하고 분노에 사로잡혀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할 때 ‘죄’는 순식간에 ‘지배’하기 위해 덮칩니다. 이 관계성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와도 비교될 수 있습니다. 하와는 아담을 원하고, 아담은 하와를 다스릴 것입니다. 둘은 서로 지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 예고 됐습니다. 죄와 가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죄는 가인을 욕망합니다. 마음을 사로잡고 지배하고자 합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죄에 사로잡힌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상태를 모르실리 없습니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음을 이미 들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아담에게 질문하신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동산 나무에 숨었을 때도 하나님은 ‘위치’를 물으십니다. 결국 가인도 죄에서 숨을 수 없습니다. 위치를 물으실 때, 여전히 찾아와주실 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야했습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만나주심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부하는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심판과 저주는 ‘땅’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가인은 농부로 정착하는 사람이어야 했지만 공동체에서 추방당함으로 떠돌아다니게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가인은 이 형벌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처벌이 과하다고 말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땅에서의 단절, 사람들과의 단절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가혹함이 닥친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호소에 대해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판결이 과했다고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일까요? 그렇다기 보다는 호소하는 죄인에게 ‘맞추어주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심판’ 중에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심판’ 자체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휼은 베풀어주십니다. 가인에 대한 피의 복수자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가인은 에덴의 동쪽 땅에서 살게 됩니다. 동쪽은 지속적으로 추방의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간에서 인간들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은 에녹을 낳고, 도시를 세웁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방랑하는 삶을 심판의 대가로 말씀하셨는데 가인이 도시를 세운다는 것은 생각할 꺼리를 제공합니다. 여기에서 도시를 세우는 것 자체에대해 하나님의 불쾌감이나 더욱 강한 심판이 임하지 않은 것으로보아서 ‘정착’ 자체에대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인의 죄를 자녀들에게까지 되물림하여 책임을 지우실 분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보면 가인이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하는 과정은 오랜 방랑의 시간으로 죄의 값을 치른 후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도시를 세운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보호가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은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간의 도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에게 ‘좋은 방식’을 찾아 행동할 것입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도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삶으로써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정의 원칙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입힌 남자를 죽임으로 살인죄를 저지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해치려 든다면 77배의 벌이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법은 깨졌습니다. 자기가 곧 법이 됩니다. 스스로가 법이되고, 왕이되고, 강력한 주인 행세를 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습니다. 라멕은 죄악의 전형이 만들어낸 오염되고 미련한 도시의 왕입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다시 아담에게 시선이 돌아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셋 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하와의 고백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셋은 자신이 낳고, 만들어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른 씨’ 입니다. 이전 본문에서 본것처럼 ‘씨’는 가능성을 다시 열어주는 기능을 합니다. 인간의 오염된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죄를 이길 여인의 후손에 대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씨’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씨앗이 발아하고 생명을 얻고 열매를 얻기까지는 매우 오랜시간,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습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은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려지며 경배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새롭게 이어지고 유지됩니다. 강력한 죄악의 도시가 탄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따라 문화는 발아하고 탄생합니다. 스스로를 법으로 내세우는 죄악된 인간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두 세계는 분열하는 듯 보이지만, 그 모든 세계가 통합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쪽 .  다음 프로그램에서 내보낸 파일입니다: Logos 성경 소프트웨어, 오후 7:57 2026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