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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한 뿌리깊은 반역 DNA_창세기 9:18-29

생성자
성경
창세기
묵상 날짜
2026/01/13
본문
창세기 9:18-29
창 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시작될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함’이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언급됩니다. 이것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되는 배경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허락하셨고 인류는 다시금 땅을 차지하며 확장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며 포도나무를 심은 것도 그런 모습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십니다. 포도나무의 수확은 하나님과 땅 사이의 관게가 회복되었다는 사실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뿌리고 거두는 때의 싸이클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안심하고 이 싸이클 위에서 경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은혜에대한 반대급부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게 됩니다. 여기에서 술이 문제라거나 취한 상태를 정죄하는 이야기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와 넘치는 포도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벌거벗은 것’입니다. 벌거벗은 상태는 죄악된 인간이 발견한 첫번째 ‘수치심’의 상태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수치심이 드러난 상태에서 함은 적절하지 않은 때,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 가게 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이야기에서 아주 단순한 사실만을 적용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과도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하체를 보고, 나가서 ‘알리는’ 것이 대대로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듭니다. 어떤 학자들은 하체를 ‘보고’ ‘알리는’ 행위 자체가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직접적으로 가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술취함과 성적인 문제가 함께 결합된다는 것, 가나안이 비정상적인 성행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서 함이 ‘성적인 부정’을 저질렀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일부는 가나안에 대한 저주가 그런 부정적인 관계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했을 때 왜 셈과 야벳이 단지 ‘덮기만’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더 많은 행동들이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당시에 벌어진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상력을 제한하고 의미만 추론하더라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나안이 아버지의 ‘권한’, 즉 명예를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빼앗는 것은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힘’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빼앗으려고 시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방식의 해석으로도 동일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이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도 인정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 아들’이 자신에게 한 일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셈, 함, 야벳 이라고 읽기 때문에 셈, 함, 야벳이 나이순일 것으로 쉽게 추측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막내’를 의미할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함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듭니다. 학자들은 ‘동해보복법’이 이뤄지고 있다고 추측합니다. 즉, 막내가 죄를 지은 일이기 때문에 함의 막내 ‘가나안’이 벌을 받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함에게 가하는 보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함이 권력구도에 대한 반기를 들며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 형벌이 되어서 저주가 막내에게 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축복을 내려줍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셈과 가나안의 갈등, 야벳과 가나안의 ‘주종관계’를 만들면서 저주가 ‘삼중적’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가나안이 받게 되는 저주의 삼중요소라는 점이 부각됩니다. 권력을 뒤집으려고 했던 함의 시도는 철저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홍수가 있은 뒤에도, 노아는 삼백오십 년을 더 살았다.
노아는 모두 구백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
노아는 삼백 오십년을 더 살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 라는 설명이 생략됩니다. 노아가 구백오십일년을 산 것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홍수로부터 삼백오십년을 계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홍수는 심판임과 동시에 완전히 다시 시작된 세계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홍수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는 여전히 죄와 반역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야기 뒤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게 될 힘과 권력다툼을 슬프게 바라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 성경은 노아의 족보 이후에 또 다른 인간의 반역을 보여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