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10-20
창세기 12:10–13 NKSV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 기근이 너무 심해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얼마 동안 몸붙여서 살려고, 그리로 내려갔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기근 때문에 중동지역에서 이집트로 이동하는 사건은 고대의 상당히 많은 자료들에서 확인됩니다.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해야만 했던 일로 보여집니다. 성경에는 유사한 사건이 두 번 더 반복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란을 떠난 날부터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생존을 위해서 이리저리 자리를 이동하며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행동이 모두다 적절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아브람의 인식속에서 사래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지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합니다. 사래의 나이는 현재 65세로 남편보다 10살 어립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탁월한 미모가 위기에 빠지게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은 얼마나 대단한 여인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인식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대에 민족의 여자 조상이 아주 비범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자랑의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탁월한 미모가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위협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착민이 아닌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은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집트에 가까워졌을 때 사래에게 ‘누이’라고 소개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근동의 관습에 따르면 아버지가 없는 동생이 결혼하기 전까지 오빠가 임시 남편이 되어서 동생이 결혼할때까지 남편의 역할을 하고 실재 결혼시에는 오빠와 혼사에 필요한 지참금을 임시 남편인 오빠와 협상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누이’라는 표현이 단지 ‘여동생’이라는 의미만 갖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이 설득력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차라리 아내라고 말하는편이 누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데 더 수월해보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들을 참고하여 성경 서술자가 의도한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면, 1) 이스라엘 민족의 여조상의 비범한 미모가 국가적 자부심의 대상이 된다는 점 2) 왕실을 드나든 족장들의 행보가 힘과 정통성을 더해준다는 점 3) 이방 국가들의 호색함과 부도덕성을 지적한다는 점 4) 인간의 모든 방책이 실패하고 결혼이라는 신성한 약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은 순간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14–16 NKSV
아브람이 이집트에 이르렀을 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아브람의 아내를 보고, 매우 아리따운 여인임을 알았다.
바로의 대신들이 그 여인을 보고 나서, 바로 앞에서 그 여인을 칭찬하였다. 드디어 그 여인은 바로의 궁전으로 불려 들어갔다.
바로가 그 여인을 보고서, 아브람을 잘 대접하여 주었다. 아브람은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
앞서 지적한것처럼 아브람의 아내는 매우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바로의 대신들도 그 여인을 칭찬했고, 바로의 궁전에 불려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의 예측과 동일한 것은 ‘누이’라는 말이 잘 먹혔다는 것이고 둘 다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대 이상의 수익도 있었습니다. 바로는 아브람에게 마치 여동생의 지참금을 주는 것처럼 또는 (지참금을 협상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강제로 사래를 데려간 것에 대한 결례와 모욕에 대한 보상으로 양 떼와 소떼와 암수 나귀, 남녀 종, 낙타까지 얻게 됩니다.
창세기 12:17–20 NKSV
그러나 주님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
그런 다음에 바로는 그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람이 모든 재산을 거두어서 그 아내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 때문에 바로와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십니다. 재앙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재앙이 바로의 집안까지 재앙을 내린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과 ‘재앙’이라는 단어가 신체적인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신체적 접촉을 하려다가 발생한 염증과 감염, 성기능 장애가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복’이 되도록 만드셨다는 점을 떠올려보면서 아브람과 같은 방향에 서지 않을 때 ‘저주’가 임하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표면적 사건에서 아브람의 믿음없음을 지적할 수 있지만, 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아브람이 당해야 했던 이방인에 대한 ‘폭력’ 또는 ‘무시’, ‘소외’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래는 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하지 않고 있지만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어머니로서 수치를 입지 않고, ‘재앙’이 내리게 되는 주체가 됨으로 그녀 역시 ‘복’의 근원이 된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는 실수를 알아차리자마자 사안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사래를 탐내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래를 돌려줄뿐만 아니라 아브람과 모든 재산을 나라 밖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추방’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고, 보호와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는 아브람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적 민감성을 보여줬고, 아브람의 거짓만이 악한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처벌받지 않고 이집트를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브람 뒤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로가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없음을 봅니다. 어떻게든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아브람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람은 생존을 위해서 약속의 땅을 이탈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아내를 위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아브람을 부유하게 만드시고 그의 인생과 삶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없음의 선택을 할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택하곤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때로 잘못된 방법과 위선적인 신앙 속에서 우리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때도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에 대해서 늘 신실하게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구원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하는 선택지들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넘어짐 너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연약한 삶의 방식들을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신실하게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누리게 해달라고 고백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