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하필QT] 달콤하게 먹은 것의 결과 / 욥 20:1-29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였다.
2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으나, 네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3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모두 나를 모욕하는 말이다. 그러나 깨닫게 하는 영이 내게 대답할 말을 일러주었다.
욥의 지적이 친구들의 말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들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지금 평행선을 달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실재로 자신들이 모욕당하고 있다 느낄만큼 서로간의 잘못을 지적한다. 소발도 욥의 말을 들으며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모욕은 ‘지혜’없는 어리석음이고 헤세드가 없는 잔인함이다.
그런데 소발은 자신의 발언의 권위를 ‘깨닫게 하는 영’에 두고 있다. 이제 전통과 어른들의 말이라는 근거가 효력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영적인 차원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 깨닫게 하는 영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에서 친구들이 전적으로 ‘틀렸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증언될 것이기 때문에 이 ‘깨닫게 하는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은 아님은 알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소발이 악의 영에 사로잡혔는가 생각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어떤 영적 존재의 유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소발은 지금 ‘거짓된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현재 이 대화 장면에서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하게 소발의 ‘기만’이다. 또한 자신의 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참칭한 월권이다.
4 너도 이런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사람이 생기기 시작한 그 옛날로부터,
5 악한 자의 승전가는 언제나 잠깐뿐이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의 기쁨도 순간일 뿐이었다.
6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머리가 구름에 닿는 것 같아도,
7 마침내 그도 분토처럼 사라지고 말며, 그를 본 적이 있는 사람도 그 교만한 자가 왜 안 보이느냐고 물으리라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소발은 욥이 ‘아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악인의 승전가’가 잠깐 뿐이고 그의 기쁨도 순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교만하고 악한자의 결말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소발이 욥에게 ‘이것은 알고 있는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그리스철학자들처럼 ‘참되게 아는 것’으로부터 지식이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합의. 참되게 아는 것은 악인의 결말은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소발의 의도는 이 ‘사라져버릴 악인’이 바로 ‘욥’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8 꿈같이 잊혀져 다시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며, 마치 밤에 본 환상처럼 사라질 것이다.
9 그를 본 적이 있는 사람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며, 그가 살던 곳에서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10 그 자녀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며, 착취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배상하게 될 것이다.
11 그의 몸에 한때는 젊음이 넘쳤어도, 그 젊음은 역시 그와 함께 먼지 속에 눕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악인의 허무함과 허망하게 사라져버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악인들이 젊음이 넘치던 때와 힘있던 때가 있었을지라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환상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자녀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배상하게 되리라는 구절에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라면 욥에게는 자녀들이 모두 죽고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용서를 구함과 배상함은 ‘욥’이 감내해야할 짐이 되고 말것이다. 소발은 친구라고 소개되지만 잔인한 언사로 가득하다.
12 그가 혀로 악을 맛보니, 맛이 좋았다.
13 그래서 그는 악을 혀 밑에 넣고, 그 달콤한 맛을 즐겼다.
14 그러나 그것이 뱃속으로 내려가서는 쓴맛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이 그의 몸 속에서 독사의 독이 되어 버렸다.
15 그 악한 자는 꿀꺽 삼킨 재물을 다 토해 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재물을 그 악한 자의 입에서 꺼내어서 빼앗긴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신다.
16 악한 자가 삼킨 것은 독과도 같은 것, 독사에 물려 죽듯이 그 독으로 죽는다.
우리는 ‘먹는 것’이 삶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고대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예레미야나 에스겔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셨고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 쓴 말씀을 받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정확히 똑같은 반응이지만, 내용물이 정 반대다. 소발이 말하는 것은 ‘악’을 달콤하게 먹었지만 독사의 독으로 만들어진 삶을 말하는 것이고, 예언자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는 달지만 심판과 재앙의 메시지들로 인해서 온 몸이 비틀려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러니까 소발이 말하는 것처럼 ‘먹는 것’이 그 삶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모든 경우에서 ‘악한’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것의 시작이 ‘악’이기만 하다는 말은 아니다. 말씀의 달콤하고 선한 것도 고통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17 올리브 기름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그는 못 볼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것도 못 볼 것이다.
18 그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도 못하고 되돌려보내며, 장사해서 얻은 재물을 마음대로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19 이것은, 그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기가 세우지도 않은 남의 집을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20 그는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한다. 탐욕에 얽매여 벗어나지를 못한다.
21 먹을 때에는 남기는 것 없이 모조리 먹어 치우지만, 그의 번영은 오래 가지 못한다.
22 성공하여 하늘 끝까지 이를 때에, 그가 재앙을 만나고, 온갖 불운이 그에게 밀어닥칠 것이다.
소발에 의하면 악인이 징벌을 받는 이유는 탐욕으로인해 가난하고 소회된자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관심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소발의 이야기는 분명 옳은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또한 전혀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데, 소발이 말하는 것처럼 욥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욥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소발은 ‘깨닫게 하는 영’이라는 초월적 지식까지 참칭하지만 결국 전혀 잘못된 판단 위에서 주장하고 있다.
23 그가 먹고 싶은 대로 먹게 놓아 두어라. 하나님이 그에게 맹렬한 진노를 퍼부으시며, 분노를 비처럼 쏟으실 것이다.
24 그가 철 무기를 피하려 해도, 놋화살이 그를 꿰뚫을 것이다.
25 등을 뚫고 나온 화살을 빼낸다 하여도, 쓸개를 휘젓고 나온 번쩍이는 활촉이 그를 겁에 질리게 할 것이다.
26 그가 간직한 평생 모은 모든 재산이 삽시간에 없어지고, 풀무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오르는 불길이 그를 삼킬 것이며, 그 불이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까지 사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깨짐으로써, 하나님이 욥을 적으로 삼으심으로써 받은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묘사하는 욥의 표현들을 읽었었다. 오늘 소발은 그와 비슷한 표현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말해 소발은 욥의 논리와 생각에서 ‘비슷한 것들’, ‘공유가능한 재료’들을 가지고 되려 욥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말의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언사는 26절이다. 모든 재산이 삽시간에 없어지고 타는 불길이 삼켜서 사람들까지 사를 것이라는 것은 욥이 당한 고통을 꼬집는 것이다. 소발은 정확하고 선명하게 욥을 꼬집는다. 욥이 악인이다. 악인이 당하기 마련인 모든 심판의 내용들이 욥에게 이뤄졌다.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밝히 드러내며, 땅이 그를 고발할 것이다.
28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그 집의 모든 재산이 홍수에 쓸려가듯 다 쓸려갈 것이다.
29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몫이며, 하나님이 그의 것으로 정해 주신 유산이 될 것이다.
소발은 하늘과 땅이 죄를 고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날에 홍수에 쓸려가듯 쓸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하게 인류의 시원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심판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인과 아벨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땅에서 아벨의 피가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메시지를 떠올리게 한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벌어지는 우주적 심판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한다.
소발은 이 심판이 바로 악한 사람들이 받게 될 몫이고 유산이라고 말하면서 욥이 당한 저주스러운 일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서 기쁨과 소망과 위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말씀을 달게 먹는것과는 다르게 그것을 삶으로 소화시키고 체화시켜서 말씀이 움직이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배’, ‘내장기관’, 우리의 영혼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재난같은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완전한 은혜이며 사랑의 반응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자식을 ‘유기’하시는게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시기도 하기 때문이며 ‘양육’받고 ‘훈련’받는 것은 부르신 목적에 따라 살아갈 방법과 계획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발의 논지처럼 ‘결과물’만 놓고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는 그저 어떻게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는지를 보여주고 증명해야한다. 그래서 입에서 달지만 배에 쓰디 쓴, 말씀을 배울 때는 재미있지만 삶에 적용하며 살아내기에 버겁고 괴롭고 힘든,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게 만드는 요소들과 서사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면류관’이 될 것이다. 오늘도 그 말씀을 읽고 듣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 속 깊숙이 자리잡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맺게 하시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우리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3.
그때 말씀은 우리를 매우 고통스러운 변화로 몰고갈 수 있다.
4.
그러나 그 변화만이 우리의 면류관이 될 수 있다.
5.
결과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열매가 있도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