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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다원주의 도시 속의 복음 / 사도행전 17:16–34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6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
18 그리고 몇몇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 사람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몇몇 사람은 “그는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아테네는 위대한 철학의 도시였고 그리스의 영광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테네에 종종 방문하면서 신전과 도시 건물을 새로 짓는 일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구주요 은택을 베푸는 자” 라고 비문을 새기기도 했다.
바울이 방문했던 도시 중에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많고 다양한 우상들이 있었다. 에베소 극장하나에만 스물 아홉개의 아르테미스 여신 금신상과 120개의 니케와 에로스 신상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더 많은 신전과 광장에 수많은 그리스의 신들이 서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테네에는 최소한 7만 3천개 이상의 우상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의 신상이 이렇게도 많은 상황에 마음이 불편하고 크게 화가나며 짜증이 났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격분’한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 예배자들과도 더불어 토론하고 논쟁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아테네의 반응은 그래서 또 다른 신 하나를 더 추가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 누가는 두 가지 반응을 기록한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그것인데 에피쿠로스 학파는 물질주의적인 학파였으므로 부활에 대해서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쟁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라는 반응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말은 매우 경멸적인 말이어서 쓰레기 같은 것을 먹는 동물처럼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몇 사람은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것인가’ 라고 반응하는데, 이것이 스토아 학파 사람들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 조차도 아테네에서 숭배되지 않은 새롭고 신비한 신을 소개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재밌는 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했다는 구분이 그 사람들의 방식으로는 예수를 새로운 신으로, 부활을 새로운 신으로, 즉- 두 개의 신을 소개하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물질주의적인 세계관과 다원주의 세계관 속에서 바울의 복음은 너무나 유약해보인다.
19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말하는 이 새로운 교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소?
20 당신은 우리 귀에 생소한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21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바울을 체포까지는 아니지만 ‘붙들어’서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와 바울의 주장을 들으려 한다. 이것은 단지 ‘알고 싶다’ 라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조금더 많은 정보와 설명을 강하게 요청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누가는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사는 외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라는 부가 설명을 붙인다. 따라서 그들에게 복음은 새롭지만 무조건 거부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와 인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거절하고 쫓아낼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기대감에 맞춰 전혀 새로운 이론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목적은 아니다. 오직 복음만이 바울이 전하게 될 유일한 메시지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23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시민들이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다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이 종교심은 경건한 삶의 태도 전체를 칭찬하는 뉘앙스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경건한 삶을 만들어내는 종교심은 ‘알지 못하는 신’조차도 예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주장은 반전을 보여준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수없이 많고 다양해서 다 파악할 수 없는 그런 신들을 예상해서 그렇게 불렀겠지만, 그 ‘알지 못하는 신’의 정체를 확실하고 분명히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스스로를 감추시고 비밀이 되셨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에 이들도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신들과의 차별점을 설명한다. 그것은 그들이 인식하는 신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고 모양이 새겨진 것들로 신전에 있지만, 과연 참된 신이 그런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에 한정된다면 참 신일 수 있겟는지 반문하는 것이다. 또한 신들이 신전에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뒤집어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신들을 섬겨야하는 아테네의 다원주의는 약점을 드러낸다. 그들은 수많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만가지의 신들을 섬기고 예배하고 신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수여하시는 분’이시지 ‘갈취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그 은혜는 ‘알 수 없는 신’에게 예배하려고 했던 마음까지 제공한 분이시기에 마음만 먹으면 그분을 감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인간이 한 혈통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한 혈통’ 이라는 말로써 ‘유대인’의 주장 이라는 사실을 인지했을 것이다.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가 정해졌다는 것도 그리스 철학자들의 용어라고 보여지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세계관 자체가 한계가 있고 수정해야 할 점이 있다고 파고드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목적이고, 얼마든지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하는데서 나오는데 신과 인류가 자연의 창조 능력에서 하나라는 범신론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우주의 질서와 체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우주의 질서와 체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우주와 질서 체계를 만드시고 그 안에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과 유사한 점과 차이점을 계속해서 언급함으로써 복음을 더욱 체계적이고 견고하게 제시해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제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의 자녀, 곧 그 질서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것으로 또다시 열화판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 세계의 원리, 스토아 학파의 용어로는 로고스 그 자체이신 분이 직접 계시하셨다. 자기를 직접 계시하지 않으셨을 때에는 눈감아주셨지만, 이제는 직접 계시하셨기 때문에 영광의 하나님을 오염시키고 왜곡해서 열화판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심판자이며, 하나님을 직접 계시하였는가? 그분이 바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리신, ‘부활’하신 예수 시다. 부활로써 세계의 체계가 닫힌 체계가 아닌 열린 체계이며, 그 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확인 시키신 것이므로 허구적 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확신으로 경험할 참된 하나님이시다.
32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 더러는 비웃었으나, 더러는 “이 일에 관해서 당신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바울은 그들을 떠났다.
34 그러나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었고,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비웃는다. 그리스 개념에서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즉, 영혼이 더욱 높은 차원의 실재라고 믿었다. 따라서 ‘육체’로 다시 일어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낮은 차원으로 왜 다시 태어나야만 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죽음’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영원한 잠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고 이 일에 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그 죽음 너머의 세계가 새롭게 되어 이 땅에 나타나게 된 이야기에대해서 궁금햇을 것이다.
이곳에서 분명히 회심한 사람들이 언급된다. 아레오바고 법정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가야 첫 열매’ 라고 묘사하기 때문에 아테네의 사역이 실패했다고 인식하기 쉽지만, 아테네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 뿐이지 회심자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곳에서 바울의 설교를 통해 회심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다. 우리의 시대만큼 다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시대가 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바울의 설교 방식이 우리에게 ‘회심’이 경험된 방식의 허용범위를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철학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 논리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수용할 부분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공동의 이해에서부터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 결론이 곧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흐름과 이야기 속에서 공동의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공동의 인식 속에 분명히 다른 이야기,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열매와 결과는 하나님께 달렸다. 우리는 그 마땅한 책임에 대해서 결코 게을러서는 안된다. 오늘 그 복음에 합당한 논리와 지식이, 담대함과 용기가 있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