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땅아, 내게 닥쳐온 이 잘못된 일을 숨기지 말아라! 애타게 정의를 찾는 내 부르짖음이 허공에 흩어지게 하지 말아라!
19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
20 내 중재자는 내 친구다. 나는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한다.
21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변호하듯이, 그가 하나님께 내 사정을 아뢴다.
22 이제 몇 해만 더 살면, 나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갈 것이다.
우리는 욥의 주장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욥은 이전의 발언에서 ‘중보자가 있어야’ 하나님께 호소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에 나의 증인, 변호인이 계신다고 확신하며 말하고 있다. 중재자의 존재는 욥의 유일한 위로다. 하늘의 증인이 계시지 않는다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원인과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낙인찍힐 뿐이다. 오로지 하늘에 계신 증인, 높은 곳의 변호인, 중재자만이 욥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 그러나 욥은 시간이 없다고 느낀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욥에게 부활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상일 뿐이다.
1 기운도 없어지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고, 무덤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2 조롱하는 무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나를 조롱하는지를 내가 똑똑히 볼 수 있다.
3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내 보증이 되어 주십시오. 내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4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셔서 다시는 내게 우쭐대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욥은 하나님께 보증이 되어달라고 호소한다. 이 호소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 자의 간절한 외침이다. 조롱하는 자들의 마음을 꺾으시고 위로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의지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이 욥에게는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증이 되어 달라는 요청과 하늘에 있는 변호인이 있다는 말은 상반된 두 존재를 말하는가?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곧 변호인이자 보증이 되어주셔야 한다. 어쨌든 욥에게는 지금 하나님밖에 없다.
5 옛 격언에도 이르기를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 하였다.
6 사람들이 이 격언을 가지고 나를 공격하는구나.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7 근심 때문에 눈이 멀고, 팔과 다리도 그림자처럼 야위어졌다.
8 정직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며, 무죄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불경스럽다고 규탄하는구나.
9 자칭 신분이 높다는 자들은, 더욱더 자기들이 옳다고 우기는구나.
10 그러나 그런 자들이 모두 와서 내 앞에 선다 해도, 나는 그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의 지혜자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본문의 해석은 개역개정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자들도 해석의 어려움에 동의하고 있다. 새번역에 따른 해석에 의하면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는 격언이 욥에게 이루어졌다고 이해된다. 5절의 해석과 상관없이 욥이 살아있는 격언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만약 5절의 격언이 욥에게 이루어졌다고 생각이 된 것이라면 욥은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렸고 그로 인한 징벌로 말미암아 자식들이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사실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욥을 걱정해서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친구들의 말들이 격앙되고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봤을때 이 격언의 적용은 더욱 악날해지는 음해와 거짓이 더해지며 잔인한 경멸이 더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욥은 속담 자체가 되었고 불경스러운 자로, 저주받아마땅한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음해는 자신들이 오히려 지혜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11 내가 살 날은 이미 다 지나갔다. 계획도 희망도 다 사라졌다.
12 내 친구들의 말이 ‘밤이 대낮이 된다’ 하지만, ‘밝아온다’ 하지만, 내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13 내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거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뿐이다.
14 나는 무덤을 ‘내 아버지’ 라고 부르겠다. 내 주검을 파먹는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누이들’ 이라고 부르겠다.
15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는가?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16 내가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갈 때에, 희망이 나와 함께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욥은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중보자를 간절히 찾았던 욥은 하나님이 오히려 자신을 적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결국 자신의 최종 결말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 자신이 바랄 것은 이제 그 죽음 속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갈 때 ‘희망’이 함께 할 수 있을까? 죽음이 곧 희망이 되는 욥의 인식 속에서 비참한 죽음의 결과물들이 자신의 형제자매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죽음은 ‘비인격적’인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관계성으로 묘사된다.
중보자를 간절히 찾지만 중보자를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중보자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하나님께서 적이 되신 상황에서의 욥은 비참한 종말만을 기약할수밖에 없다. 친구들의 조롱과 경멸은 거짓말로 과장되고 확대된다. 결국 욥이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죽음이다. 이때 죽음은 비인격적인 허무적 종결이 되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종결이 되기를 바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보자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점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위대한 중보자가 계시며 우리를 향해 가리키는 모든 정죄와 과장되고 확대된 부정적인 평가들에 대해서 감싸주시며 보호해주시는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또한 우리에게 죽음은 ‘비인격적’인 것도, ‘허무적 결말’도, 그 안에서 누릴 영원한 쉼과 안식조차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 죽음은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의 진짜 종착지는 죽음을 통과한 ‘부활’이다.
우리의 억울한 누명과 고통과 아픔으로 뒤범벅된 인생이라도 부활을 통과할 때 중보자께서 우리를 신원하시고 참된 위로와 소망을 부어주실 줄 믿는다. 그 소망이 우리를 적대하는 모든 소리들에서 우리를 건져낸다. 다시 참된 위로와 소망이 부활에 있음을 바라보면서 그 은혜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욥은 중보자를 바라지만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2.
욥이 생각하는 최후의 결말은 죽음에서 누릴 안식이다.
3.
그러나 그 마저도 비참하다.
4.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중보자께서 죽음을 통과한 부활을 허락하신다.
5.
그것이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