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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한탄과 원망과 낙심으로 드리는 기도 / 욥 30:16-31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6 나는 이제 기력이 쇠하여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나는 괴로운 나날들에 사로잡혀서, 편하게 쉬지 못하였다.
17 밤에는 뼈가 쑤시고, 뼈를 깎는 아픔이 그치지 않는다.
18 하나님이 그 거센 힘으로 내 옷을 거세게 잡아당기셔서, 나를 옷깃처럼 휘어감으신다.
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속에 던지시니, 내가 진흙이나 쓰레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존귀했던 욥이 비참한자들에게조차 비난받는 모습을 어제 살펴봤다면 그 수치심과 더불어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욥을 보게 된다. 우리가 전반적인 욥의 말들을 살펴봤던것처럼 욥은 관계에서의 파괴, 신체적인 고통등 전인격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다. 어제의 본문이 그런 관계에서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본문은 신체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고통을 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욥은 죄의 결과로 생각하거나 노화의 문제 등으로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야 할 문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힘으로 일하실때 한낱 인간인 욥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다.
20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21 주님께서는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 힘이 세신 주님께서, 힘이 없는 나를 핍박하십니다.
22 나를 들어올려서 바람에 날리게 하시며, 태풍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23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끝내 나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만나는 그 죽음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24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 몸을 치십니까? 기껏 하나님의 자비나 빌어야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이 몸을, 어찌하여 그렇게 세게 치십니까?
욥은 결코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잔인하게 자신을 향해 일하고 계시며 힘없는 욥을 핍박하고 계신다. 심지어는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지금 욥은 하나님을 향해 있는 힘껏 하나님의 부당함을 가지고 ‘소리친다.’
우리는 욥의 인내에 대한 이야기를 히브리서를 통해 배우게 되는데, 고통중에 끝까지 의로움을 지켰다는 ‘행위’에 집중하기 쉬운것 아닌가 생각한다. 오히려 욥의 인내는 하나님을 향한 인내다. 고통중에, 아픔 중에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한다. 현실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의 때리심이 기가찰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운데도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욥의 인내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끈질기게 붙들어잡는 것이었다.
25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26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쳤구나. 빛을 바랐더니 어둠이 밀어닥쳤다.
27 근심과 고통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28 햇빛도 비치지 않는 그늘진 곳으로만 침울하게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면 도와 달라고 애걸이나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욥은 내면적으로도 성숙한 사람이어서 고난받는 이와 함께 울고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욥을 향해서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욥이 바라는 행복이란 어쩌면 그런 관계에서 베풀어진 것들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베풀어주었던 자비는 ‘화’로, 비난과 경멸과 조롱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욥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에는 도움을 주었는데, 도움으로 되돌려받기는 커녕 애걸하는 신세가 된 비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29 나는 이제 이리의 형제가 되고, 타조의 친구가 되어 버렸는가? 내가 내 목소리를 들어 보아도, 내 목소리는 구슬프고 외롭다.
30 살갗은 검게 타서 벗겨지고, 뼈는 열을 받아서 타 버렸다.
31 수금 소리는 통곡으로 바뀌고, 피리 소리는 애곡으로 바뀌었다.
이리와 타조 또는 수리부엉이는 ‘폐허에 거주하는 생물들’로 언급되곤한다. 그리고 이런 동물들은 썩은 동물을 먹는 짐승으로 이해되곤 했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야생의 짐승처럼 되어버린 비참한 인생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살갗이 검게 탄 것으로 표현되는 병든 모습과 타버린 뼈로 표현되는 내면의 고통을 설명한다. 이제 노래는 장송곡이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슬픈 노래만이 울리고 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욥의 모습을 발견해보자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갖 고통을 짊어지셨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십자가라는 형틀 자체가 비인격적이어서 아무나 십자가 처형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통의 끔찍함은 가히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예수님의 더욱 가혹한 형벌은 하나님과의 절대적 단절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고 고통에 찬 목소리를 외면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만큼 친밀하게 교제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신채 ‘하나님’으로 부르신다. 친밀한 관계가 ‘공식적 시편’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는 관계로 전락하고, 끔찍한 단절이 경험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는 기도로 마치신다.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모든 것을 두셨다.
욥과 예수님이 하나의 모델이 된다면, 하나님이 지금 전혀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일하심이 전혀 경험되지 않는 상황이라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된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답이시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음조차 굴복시키실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하면 부활을 기대하는 우리는 끈질기게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 우리의 고통과 아픔에 머무르기보다 하나님 앞에 나가길 결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욥은 신체적, 심리적 고통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2.
그럼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대 놓지 않았다.
3.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대 신뢰하셨다.
4.
우리도 끈질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