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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죽음은 결론이 아니다 / 욥 21:17-34/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7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18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19 너희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 하고 말하지만, 그런 말 말아라! 죄 지은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제 죄를 깨닫는다.
20 죄인은 제 스스로 망하는 꼴을 제 눈으로 보아야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
21 무너진 삶을 다 살고 죽을 때가 된 사람이라면, 제 집에 관해서 무슨 관심이 더 있겠느냐?
욥은 다시금 죄인들에게 벌어진 심판이 과연 현실세계에서 관찰가능한가를 질문한다. 그에대해서 욥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모든 악인들이 그들의 죄과를 다 담당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의 수정된 입장은 아버지의 죄과가 아버지의 대에서 치러지지 않는다면 자식대에 그 벌이 임한다고 주장하는데, 욥은 죄에 대한 심판이 결코 연좌제 형태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죄인은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죄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가 다 죽을 때가 된 사람인데도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더이상 죄를 뉘우칠 필요가 없이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욥의 입장처럼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진노의 잔은 먼저 하나님의 아들에게 쏟아부어졌다. 죄의 심판이 연좌제 형태로 이뤄져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대표자’에게 전가하셨다. 오로지 그분이 대표로서 진노의 잔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잔을 돌려주실 것이다.
22 하나님은 높은 곳에 있는 자들까지 심판하는 분이신데, 그에게 사람이 감히 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
23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기력이 정정하다. 죽을 때에도 행복하게, 편안하게 죽는다.
24 평소에 그의 몸은 어느 한 곳도 영양이 부족하지 않으며, 뼈마디마다 생기가 넘친다.
25 그러나 어떤 사람은 행복 하고는 거리가 멀다.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26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다 함께 티끌 속에 눕고 말며, 하나같이 구더기로 덮이는 신세가 된다.
하나님의 지혜는 감히 누가 따라갈 수 없다. 하나님이 그 모든 지혜와 규칙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 누가 옳고 그름을 가르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예시로 두 사람을 든다. 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은 상태로 죽는다. 다른 한 사람은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전혀 다른 삶을 살지만 결과가 같다. ‘죽는다’ 라는 것이다. 주의깊게 읽어보면 여기에서 어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나 선악에 대한 설명이 부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와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죽음’만이 인간이 맞이하게 될 유일한 동일결론이다.
27 너희의 생각을 내가 다 잘 알고 있다. 너희의 속셈은 나를 해하려는 것이다.
28 너희의 말이 “세도 부리던 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악한 자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느냐?” 한다.
29 너희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 본 일이 없느냐? 너희는 그 여행자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30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 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한다.
31 그 악한 자를 꾸짖는 사람도 없고, 그가 저지른 대로 징벌하는 이도 없다고 한다.
32 그가 죽어 무덤으로 갈 때에는, 그 화려하게 가꾼 무덤으로 갈 때에는,
33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골짜기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고 한다.
34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빈말로만 나를 위로하려 하느냐? 너희가 하는 말은 온통 거짓말뿐이다.
욥이 생각하는 증거는 명백하다. 악한자들, 세도를 부리던 자들의 결말또한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그것은 전혀 그들의 삶의 결과가 곧 그들의 선함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보면 누구라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만큼 수많은 데이터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실재로 경험하는 일들이다.
욥은 여기에서 친구들을 비난한다. 친구들의 생각은 ‘욥’의 결론만 놓고 그의 인생 전체를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욥은 매우 억울하다. 그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았고, 결과에 따라서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 친구들의 말은 욥을 죽이려는 말일 뿐이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지는 동일한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악을 관리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악인들도 훌륭하게, 편안하게 노후를 살다가 죽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대체 어디계시느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비참함의 결말을 동일하게 겪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끝이라면 대체 인생의 보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이득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로하여금 그분의 정의로우심과 선하신 은혜로우심이 과연 ‘죽음’이라는 고통에서 끝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제한된 경험은 죽음 너머를 상상할 수 없다. 욥과 친구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만큼은 다르다. 우리는 죽음 너머의 ‘부활’이라는 영원한 세계가 펼쳐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영원한 세계에 입각해서 우리의 심판을 생각해야 한다. 이 땅에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절망의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 땅에서 제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고 죽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심판하실 영원하신 왕의 지혜로우신 판결이 남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우주의 왕께서 심판대 위에서 인생을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옥의 불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에 붙들려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 손을 뿌리칠 때 심판은 매서울 것이며, 그 손을 붙잡을 때 심판은 ‘위로와 소망과 영원한 기쁨으로 다가 올 것이다.
그 영원한 심판을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으로 바라보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한 결론은 ‘죽음’이다.
2.
죽음의 형태가 그들의 삶을 정의 내릴 수 없다.
3.
진짜 참된 심판은 하나님만이 내리신다.
4.
우리에게 죽음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5.
중보자를 붙잡는 자들에게만 죽음이 소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