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27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29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마차에 바짝 다가서거라.”
우리는 이전 본문에서 사마리아가 부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제는 예루살렘의 남부쪽인 가사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일방적 방향성으로 확장하지 않고 전세계적인 방향으로 확장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가사’지역과 ‘광야길’ 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볼 때 그곳에 지금의 ‘부흥’과 같은 일이 일어날 곳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의 가사는 폐허가 된 곳이었다.
빌립은 에티오피아 사람 간다게의 고관으로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를 만나게된다. 만약 이 내시가 이방인이라면 후에 등장하게 될 고넬료만큼이다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더 자세한 설명이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전세계에 퍼져있었고 그들이 고위관료가 된 예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써 고자가 된 사람일 수 있다. 그랬을 때 그의 예배를 위한 여정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배경이 더욱 넓은 범위에서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내시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읽고 있다. 장소가 폐허가 된 가사, 광야의 길, 포로가 되어 고향을 떠나게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 고자가 되어 거절 당할만한 인물에게 그를 구원해줄만한 이야기를 읽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가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빌립은 성령의 명령에 따라 이사야의 글을 읽는 내시를 만나게 되고 내시는 그 글의 내용을 질문한다.
슈나벨이 정리한 것을 인용하면, 그 질문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던진 질문과 동일한 것이었다. 고난 받는 종은 이스라엘 백성인가? 다윗과 같은 통치자인가? 하나님의 메신저인가? 선지자와 같이 이스라엘을 위해 사명을 받은 자인가? 이사야 자신인가? 공의를 베풀며 열방의 빛인 그 종은 누구인가?
물론 언급된 ‘종’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하나님의 전령인지, 청중에게 늘 거부당했던 이사야인지 불분명하더라도 글의 내용의 핵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고난받는 종은 선택받은 의로운 종으로 인식되었고 몇몇 중간기 기록들은 이 사람을 메시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시는 답에 가까이 다가갔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35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36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빌립은 바로 그 말씀의 주인이 이미 오셨고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사실, 그 복음을 전한다. 빌립은 이사야의 고통받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분의 세례받으심부터 시작해서 이사야 말씀처럼 고통받으심과 영광까지 설명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에티오피아 내시는 물을 만난다. 그들이 광야 길과 황폐화된 가사 지역을 지나간 후, 그들이 물을 만났다는 장면은 흥미롭다. 이제 그들에게 광야는 사라지고 새롭게 될 물이 등장한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40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이 장면은 매우 신비롭다. 그들은 둘 모두 물로 내려간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간다. 성령께서 데리고 가셨다는 말은 내시의 눈에 빌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내시에게는 매우 신비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장면은 계속해서 폐허와 광야와 고통과 버림받음이라는 주제들, 인물들을 보여주다가 복음을 전해주는 빌립의 등장과 함께 물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며 기쁨으로 가득차는 장면으로 바뀐다.
내시의 기쁨은 그 길이 더 이상 이전의 고민이 아니라 말씀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이며 그 완성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분명히 고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돌아오게 되리라는 이사야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졌다는 큰 만족감으로 경험되었을 것이다.
빌립은 아소도로부터 시작해서 순회설교자로, 복음전도자로 사역하다가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21장에 가면 빌립이 가이사랴에 정착해 복음을 전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통해 거절과 추방의 역사를 가진 인물이 광야와 폐허에서 어떻게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변화되었는가를 추적해볼 수 있었다. 오로지 말씀의 바른 해석과 성령님의 인도가 있을 때 그 시간과 장소 속에서 회심과 기쁨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에 말씀의 바른 해석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우리의 참된 변화와 기쁨이 넘쳐날 줄 믿는다.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광야와 폐허 속에 있는 것 같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결코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넘치도록 경험케 하실 줄 믿는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