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으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도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
2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3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끝으로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단어는 아직 빌립보서가 끝나려면 남은 내용들이 많기에 어색하다고 느껴진다. 여기에서는 끝으로 보다, ‘남은 사항은’ 또는 아울러 라고 번역하면서 추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전의 본문들에서 바울이 계속해서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일에 대해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을 강조하면서 이야기하는 이유, 예수님과 디모데, 에바브로디도의 예를 들면서 참된 사랑의 교제와 헌신을 이야기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작은 로마의 시민들인 빌립보교회’의 코이노니아 없음을 역설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남은 사항이라고 말하며 덧붙이는 사항들은 이런 빌립보교회의 오류를 꼬집는 내용들이 될 것이다. 바울은 아주 강력하고 신랄한 어조로 ‘개들, 악한 일꾼’,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주심으로 얻어진 의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진짜 참된 할례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 안에서, 육신이 아닌 성령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4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서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가 참 할례 받은 자들’이라고 설명한것과 대비되게, 자신이 육신을 의지하는 자였음을 4절부터 설명하고 있다. 육신에 관련된 내용이 단지 ‘율법 준수’에 대한 것만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미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교 전통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방식인 할례를 통해 육신의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다. 전통적 언약의 체결 방식으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율법에 얼마나 충실했고, 실행했고, 그것을 자신의 의로 삼았는지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것이 앞서 신랄한 어조로 비판했던 자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자랑하려면 자랑할만한 어떤 것들보다 사도 바울이 더욱 탁월하게 자랑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참된 코이노니아를 경험하는 것은 육체적 방식의 ‘행위’로써는 도무지 일어 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7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 어쩌면 자신이 살아가는데 이로울 수 있던 모든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기로 작정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나머지의 자랑할 것들은 ‘오물’로 여기기로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신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으려고 할 뿐이다. 이 인정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가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전통과 율법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를 얻는 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로움은 어디에서 발생되는가?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심으로써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참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자들, 그분을 닮아가길 간절히 원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에게서 온다’. 이 말의 강조를 보라. 사도바울은 스스로 얻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지는 의를 얻고자 한다.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코이노니아를 이루며 친밀하고 깊은 교제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지식에 이르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다면, 이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로우심의 열매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의 강렬한 표현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것은 이 부활이 가지는 의미와 능력 때문이다. 이전의 자랑할만한 것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얻어야 할 가치가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밭에 숨겨진 보화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물을 팔아버리는 사람의 이야기와 같다.
사도 바울의 강렬한 부활에 대한 소망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는 고린도전서의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결론이 부활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을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부활이 어떤 율법의 전통과 행위를 통한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온다는 사실 때문에, 대적자들을 경계하고 피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부활을 얻을 수 없다. 어떤 의로움도 성취해낼 수 없다. 어떤 누구라도 ‘영원’을 허락받은 참된 의로움을 가진 적이 없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의로움, 부활을 얻으셨다. 그분의 완성하심을 믿는 자들이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이다. 이 믿음을 공유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착한일을 시작하신 분의 완성때까지 이루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깊고 선명한 교제 코이노니아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율법의 전통과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아니라 스스로의 의로움이 만들어진다.
2.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없다.
3.
부활이라는 확고하고 증명된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다.
4.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부활을 얻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