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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끝나지 않는 이야기 / 사도행전 28:16–31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하필QT] 끝나지 않는 이야기 / 사도행전 28:16–31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울은 그를 지키는 병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울은 그 곳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우리 겨레와 조상들이 전하여 준 풍속을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수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 사람은 나를 신문하여 보았으나,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놓아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대 사람이 반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 이런 까닭으로, 나는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병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낼 수 있다는 허락을 받는다. 이것은 그가 가택연금을 당했다는 의미인데 한 명의 군인 아래 사적 공간에서 살도록 허락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본에 의하면 백부장은 죄수들을 ‘로마 진영’ 의 최고위장교에게 인계하셨다. 하지만 바울은 진영 밖에서 따로 살도록 허락받았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은 관리의 효율을 위해서 군인들과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사흘 뒤에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율법을 무시한적이 없고 전통을 없애려고 계획한적도 없다고 항변한다. 로마 사람도 신문했지만 사형에 처할만한 근거가 없었다고 말한다. 하는수없이 황제에게 상소한 것이지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로마에 온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진짜 의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진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며, 바울이 쇠사슬에 매여도 좋은 것도, 미움 받아도 좋은 것도, 이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에 헌신하고 더욱 온전한 유대인이 되는 것도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여기에 모인 이들이 가져야 할 소망이다.
21 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아직 유대로부터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동포들 가운데서 아무도, 여기에 와서 당신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거나 소문을 낸 일이 없습니다.
22 우리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종파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서나 이 종파를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입니다.”
23 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24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아직 바울에 대한 제대로된 소식을 받은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있는 산헤드린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한 소송건이 로마에 이첩되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에게 재판 또는 물리적 제재를 가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랬다 하더라도 성공할리가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로마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서신 또는 사람들에 대해서 모른척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에 나오는 말에서 ‘이 종파’가 어디에서나 반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한 적이 있었다고 언급한 것을 떠올려보면 그들도 이 복음의 이야기를 아주 몰랐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으로 문제가 생겨서 추방까지 당했었기 때문에 조심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해보인다.
이제 바울과 유대인 공동체는 만날 날짜를 정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택연금되어 있는 바울을 찾아온다. 바울은 엄숙하게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과 글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핵심은 유대교의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데 있다. 그들이 이 복음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전반에서 나누것처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때 사람들로부터 긍정적 반응과 반대의 반응이 갈라져 나가는 것을 지적해왔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안에도 분명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 반응을 보인 유대인들이 이미 세워져있는 교회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들의 갈라진 반응은 이제 바울의 사역에 대한 더욱 확고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선교이다.
25 그들이 이렇게 견해가 서로 엇갈린 채로 흩어질 때에, 바울은 이런 말을 한 마디 하였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에게 하신 말씀은 적절합니다.
26 곧 이런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27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28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소식이 이방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에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었는데, 조상의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그런 상태에 놓여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상태는 결국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상황이다. 그들은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율법과 전통’을 사랑하고 그것을 예배한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눈을 감고 모세의 율법과 전통에만 몰두해있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하신 분을 바라보는 이들은 율법과 전통에서 자유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이방 사람들’이 더욱 잘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전통’이라는 걸림돌이 없기 때문이다.
30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바울은 그곳에서 두 해 동안 지내면서 모든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가르쳤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이야기가 왜 이렇게 어색하게 끝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했다. 누가는 이 순교의 장면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누가는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뒤이어 세번째 책을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갈수록 높아지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박해의 사실을 모른척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끊임없이 회심자들과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차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언하는 일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어려움과 깊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무시하고 또는 거부한다. 심지어 박해하고 없애버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이후의 2000년 가까운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가 단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고 무너지지 않았으며 바울처럼 용감하게 복음을 전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수 잇다. 우리는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지만 결코 ‘실패’ 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바울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성경의 빈칸이 갖는 의미는 그곳에 바로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 복음의 행진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