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나는 황금을 믿지도 않고, 정금을 의지하지도 않았다.
25 내가 재산이 많다고 하여 자랑하지도 않고, 벌어들인 것이 많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않았다.
욥은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욥의 태도에 의하면 부유함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져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유시다. 단지 허락받은 것뿐이다. 따라서 자랑의 요소도, 기쁨의 근거도 될 수 없다. 물질을 얼마나 책임있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욥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위해 베풀고 나누는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욥의 재물관이었다.
26 해가 찬란한 빛을 낸다고 하여, 해를 섬기지도 않고, 달이 밝고 아름답다고 하여,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
27 해와 달을 보고,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것에다가 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와 달을 경배하는 표시로 제 손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28 그런 일은 높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벌로 사형을 받아도 마땅하다.
자연만물의 장엄함을 보고 그 위대함에 눌려 그것을 경배하고 숭배하는 것은 매우 기초적인 종교심의 발흥이었다. 욥은 그런 것을 분명하게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그런일은 벌이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우상숭배는 사형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결론 내린다.
우리의 시대에 우상숭배는 더욱 치밀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시대의 우상숭배는 ‘과학’과 ‘쾌락’이다. 해와 달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잘못된 것이 아니듯이 과학과 쾌락 그로부터 오는 장엄함과 즐거움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숭배’하는 방식은 철저히 하나님을 배척함으로 오염된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만가지의 ‘하나님 죽이기’와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숭배가 결합한다. 그 끝과 결과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29 내 원수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나는 기뻐한 적이 없다. 원수가 재난을 당할 때에도, 나는 기뻐하지 않았다.
30 나는 결코 원수들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여 죄를 범한 적이 없다.
우리는 욥이 원수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시길 구했었던 기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복수’를 위한 기도와 오늘의 ‘죽기를 바라는 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의 복수는 원수들의 ‘행위’에 대한 갚아주심이다. 그러나 원수가 재난 당하고 고통받는 때에 그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닥친 형벌을 넘어서는 형벌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욥이 생각하는 공의의 개념은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욥의 기대는 원수의 고통과 아픔에 눈감았다면, 지금 자신의 고통과 아픔에 눈감아주길 바라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원수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31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내가 언제나 나그네를 기꺼이 영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32 나는 나그네가 길거리에서 잠자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으며, 길손에게 내 집 문을 기꺼이 열어 주지 않은 적도 없다.
33 다른 사람들은 자기 죄를 감추려고 하지만, 그러나 나는 내 허물을 아주 감추지 않았다.
34 사람들이 무슨 말로 나를 헐뜯든지, 나는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에게서 비웃음을 받을까 하여, 입을 다물거나 집 안에서만 머무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욥은 매우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다룸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열린 포용심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이로써 허물은 있지만 기꺼이 품안에 품을 수 있는 커다란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존중과 존경이 뒤따르리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롭고 공의로운, 약자들을 보살필 수 있는 실력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해서든지 남을 비방하고 헐뜯고 잘못을 감추기에 급급한 시대에 도전이 되는 것 같다.
35 내가 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36 내 원수가 나를 고발하면서, 뭐라고 말하였지? 내가 저지른 죄과를 기록한 소송장이라도 있어서, 내가 읽어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것을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다니겠다.
37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
38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39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
40 내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거나 보리 대신 잡초가 돋아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겠다. 이것으로 욥의 말이 모두 끝났다.
지금까지 욥의 발언을 되짚어보면, 욥은 지혜에 대한 찬가를 부른 후에 자신이 얼마나 존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는가를 설명하고 그 이후에 자신이 당한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들에 대해서 열거한 뒤에,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은 오로지 하늘에 계신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만’ 들어주셔야 한다. 그것을 정말 간절히 원한다.
욥은 자신의 소송장을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소송장이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된다면 자랑스럽게 쓰고 다니겠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기꺼에 받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욥의 항변에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하나님도 침묵하신다.
그러나 지금 욥의 소송장은 바로 자신이 써내려간 자신의 삶일 것이다. 자신이 어깨에 메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겠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것은 어깨에 매어야 할 열매이며 왕관처럼 머리에 써야할 면류관이다. 그 열매와 면류관이 비참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다.
이 말도 안되는 소송장을 우리 주님께서 받아드셨다. 예수님은 무고당하셨다. 죄 없으신 분께서 만들어진 죄목들로 고발당하셨다. 그분의 머리 위에 씌워진 죄의 명패는 ‘유대인의 왕’이었다. 고발한 자들의 소송장이 우리 주님의 명패가 되셨다. 그것은 허위 고발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리고 억울함 죽음을 뚫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모든 허위를 적발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열매이며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고통스럽고 아픈 것일지라도, 반드시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실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최선을 다해 우리의 소송장이 원수들에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우리 주님 붙들고 열매 맺는 인생,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 살기를 다짐하자. 그 승리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욥은 한치의 거짓 없이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2.
진실한 삶의 무게가 때로 소송장과 고발장으로, 고통과 아픔과 피흘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를 갚아주신다.
4.
따라서 신뢰함으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