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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고통인가, 고행인가 / 욥기 33:1–33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욥 어른은 부디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이제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말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내 입 속에서 혀가 말을 합니다.
3 나는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4 하나님의 영이 나를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5 대답하실 수 있으면,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토론할 준비를 하고 나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제 엘리후가 의심스러운 영성가로서 말 잔치를 늘어놓는 인물이라고 지적했었다. 오늘 본문 또한 자신의 말을 ‘잘 들으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생명을 주신 존재라고 소개한다. 어제와 마찬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자신이 ‘영적 권위’가 있는 자로 소개하려고 하는 것 같다.
엘리의 발언이 한참을 지나가고 있지만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할만큼 핵심적인 논지의 문장을 찾기는 어렵다. 여전히 ‘말 잔치’는 계속되고 있다.
6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른이나 나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7 그러므로 어른께서는 나를 두려워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내게 압도되어서 기를 펴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8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9 “내게는 잘못이 없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결백하다. 내게는 허물이 없다.
10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시며,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
11 하나님이 내 발에 차꼬를 채우시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감시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 사이에, 하나님과 욥 사이에 중개자가 되려고 시도한다고 지적했었다. 그래서 6절은 욥과 엘리후가 동등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흙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엘리후]가 적극적으로 중자재의 위치로 가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이제 엘리후는 욥의 발언을 재조명하면서 욥이 자신을 허물 없는 존재, 흠 잡을 것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시하시면서 원수로 여기시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펼칠 것이다.
12 그러나 내가 욥 어른께 감히 말합니다. 어른은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십니다.
13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 있습니까?
14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뿐입니다.
15 사람이 꿈을 꿀 때에, 밤의 환상을 볼 때에, 또는 깊은 잠에 빠질 때에, 침실에서 잠을 잘 때에,
16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경고를 받고, 두려워합니다.
17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18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며, 사람의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는 친구들의 말이 ‘진실’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지적했었다. 다만 그들이 전하는 말들의 태도와 목적, 결론만을 가지고 과정을 왜곡해서 판단하고는 정죄하는 것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엘리후는 친구들과는 다른 독특한 접근을 시도한다. 바로 ‘영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꿈과 환상으로, 깊은 잠을 자는 침실에서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만드실 수 있다. 그런 ‘환상적 지식’으로 얻은 ‘경고’를 통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교만하지 않도록 만드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엘리후에 따르면 ‘고통’의 이유는 ‘영적인 성숙’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으로 읽혀진다.
19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20 그렇게 되면, 병든 사람은 입맛을 잃을 것입니다. 좋은 음식을 보고도 구역질만 할 것입니다.
21 살이 빠져 몸이 바짝 마르고, 전에 보이지 않던 앙상한 뼈만 두드러질 것입니다.
22 이제, 그의 목숨은 무덤에 다가서고, 그의 생명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3 그 때에 하나님의 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이 그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24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천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그를 살려 주어라. 내가 그의 몸값을 받았다.”
25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건강도 되찾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병과 고통을 통해서 잘못을 고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입맛을 잃고, 좋은 음식앞에 구역질하고 몸이 마르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적절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고치시고 싸매실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영적인 차원에서 회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분명 좋은 것을 입고 먹고 마시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 잇는 것들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용서와 가치있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찮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엘리후가 자기를 영성가로 소개하고 그런 측면에서의 조언은 꽤나 적절하다. C. S. 루이스의 말이 자주 인용되는데, 고통은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깨어난 자들은 세상의 것들보다 우선순위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겸손의 자리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신다.
26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27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옳은 일을 그르쳤으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28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구원해 주셨기에, 이렇게 살아서 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29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이렇게 되풀이하시는 것은,
30 사람의 생명을 무덤에서 다시 끌어내셔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회복시켜주심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용서하시고 고쳐주실 것이다. 세번 반복된 회복은 마침내 생명의 빛을 보게 만드시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 번을 ‘완전함’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완전히 회복할만큼 끝까지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통을 당하지만 훈육을 당하는 중인 인간은 그 목적이 이뤄질때까지 ‘무덤에서 끌어내져 지는 것’처럼 결코 쉽게 죽음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31 어른은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내가 말하는 동안은 조용히 듣기만 해주십시오.
32 그러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내가 듣겠습니다. 서슴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어른이 옳으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33 그러나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조용히 들어 주시기만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어른께 지혜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엘리후는 마치 노련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욥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혼자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욥기 전반에 등장하는 지혜 논쟁, 누가 지혜를 가졌는가 라는 논쟁에 엘리후도 참전한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신의 논점이 지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엘리후는 ‘영적 진리’를 말하려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말 잔치’로만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엘리후의 말 또한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해서 한 인간을 만들어 가신다는 관점은 매우 옳은 말이다. 우리 또한 받아들일만한다. 그러나 고통을 당할 때 그 목적이 이뤄질때까지 쉽게 죽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생각컨대 엘리후의 관점이 ‘거짓된 영성가’로써 말하는 것이라면 고행을 통해서 몸을 괴롭게 함으로써 진리 앞으로 나아가려고 수행했던 고행수행자들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어쨌든 성경이 이런 방식의 고행을 긍정하지 않을 뿐더러 참된 회개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 일어난 전인격적 변화여야 한다.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도 ‘영적인 측면’이라고 말하면서 과도한 행위를 강조하거나 잘못된 적용을 한다면 스스로 만들어낸 율법주의에 빠져버릴 수 있다. 엘리후는 너무나 ‘많은 말들’로 그런 함정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우리의 고통의 문제는 ‘훈련적 차원’에서 다뤄지는것도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훈련은 일부일 뿐이고 최종적 목적과 해결은 죽음과 부활 이후에만 완전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이뤄진 영성을 벗어나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한 인간을 만들어 가신다.
2.
그러나 그것이 ‘고행’을 통한 수련과 같은 거짓 영성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3.
고통은 오로지 죽음과 부활을 통과 했을 때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4.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는 삶의 참여만이 우리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