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37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많은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다윗의 자손’으로써 들어오셨다. 바디매오가 그렇게 고백했고, 사람들은 호산나를 부르며 다윗의 자손을 환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과연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신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통해 ‘주께서 내 주께’ 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이 점을 지적하시면서 다윗이 ‘주님’은 하나님으로, ‘내 주께’는 다윗의 상급자로 인식했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으라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상급자’이며 더욱 높은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110편이 가지는 제왕시로써의 기능을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해석을 하시는데 어떤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런 해석에 동의하고 있었음을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말씀을 무리는 ‘기쁘게’ 듣고 있다.
따라서 이전의 본문의 내용들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방식으로 오실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을 초월하여 다윗보다 위대한 ‘주’ 퀴리오스 로써 고난 받는 종이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말한 ‘주’ 곧 하나님의 아들은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로부터 죽임당하고 버림받듯이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장소인 ‘성전’을 생각해봐야 한다. 성전은 그 기능을 잃어버렸고, 이곳의 주인은 더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탐욕스럽고 잔혹한 강도들의 집이 되어버렸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강도짓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주의시키신다. 그들의 행동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매우 ‘교만한’ 행위를 여러가지 방면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들의 격식에 차린 옷을 입는 행위는 공공장소에서 존중을 받기 위한 행동이었다.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는 권위를 차지하기를 원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최상의 섬김을 받길 원한다. 그들의 신앙적 행위에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모든 행위들이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 모든 보여지는 행동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어떻게 보면 이전 행동들과 동떨어진, 숨겨지고 은밀한 행위를 둘러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행위를 권위와 아부와 공적인 수행과 보이는 경건으로 포장하고 뒤덮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행동들이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우리는 이전의 본문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으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기능을 잃어버린것을 지적하신 적이 있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지금 이들은 기도하는 집의 ‘형태’는 보이지만, 그 속에서 강도짓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심판은 성전, 곧 산이 바다에 빠지게 될 심판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어지는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와 성전 파괴 예언을 동시에 묶어보아야한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우리는 이 본문의 이야기를 결코 작은 금액의 헌금이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으로, [긍정적인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이야기의 핵심은 ‘헌금’을 드림이 아니다. 그것이 ‘전부’라는 표현은 더욱 강조되어서, 바로 성전이 이 ‘전부’를 집어삼키는 강도의 소굴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40절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는 표현을 온갖 경건과 포장된 권위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과부의 두 렙돈은 과부에게 있어서 전 재산과 같다.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는 그 간절함을 성전은 집어 삼킨다.
그렇다면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하는 성전의 기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사회적 제도와 장치가 그들을 구휼하고 있었을까? 본문은 이러한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성전이 가져야 할 원래적 기능이 어떻게 완전히 망가지고 작동하고있지 않은지를 지적한다.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향해 ‘심판’은 예고될 것이다.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것처럼, 성전은 굉장한 ‘돌’, 굉장한 건물로 경탄을 자아낼만한다. 하지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 심판의 예고는 완전히 기능이 고장난 성전에 대한 최후통첩이다. 산을 바다에 던지듯이 성전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일로 인식되었겠지만, 그런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들은 충격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그 내부가 이미 강도의 소굴로써 과부와 약자들의 소산을 집어 삼키는 일만 하고 있는 이상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여전히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놀라하며 관광객처럼 보고 있지만, 그 실상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우리의 ‘보여지는 경건’, ‘보여지는 성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그럴싸해보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것과 상관없이 목숨걸고 사랑할 하나님에 대한 사랑, 제한 없는 열려있는 환대를 가져야할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욱 중요하다. 이 시대의 겉으로 번지르르한 아름다운 성전 같은 복 받은 인생을 추구하려는 속된 모습보다 참된 십자가의 가치가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게 더 중요한다. 그 본질적인 사랑으로 부르시는 참된 은혜가 우리 안에 실천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