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3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우리는 고넬료 이야기가 요나의 이야기를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심하고 니느웨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사흘길 되는 니느웨에서 고작 하루를 말씀 전했을 뿐이고 갑자기 회심하는 이들로 인해서 매우 분해하고 화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후에 할례 받은 이들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일로 인해서 그들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베드로의 보고를 듣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에 대해 기쁨으로 반응하던지, 요나처럼 불평하던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여 있다.
4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5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황홀경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하늘에서 드리워져 내려서 내 앞에까지 왔습니다.
6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위의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7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8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10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서 모든 것은 다시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반대와 항의에 맞서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반복을 의미없고 지루한 반복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 사건 뒤에도 예루살렘교회 유대인 공동체는 과연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누가가 사건을 반복진술하는데서 그치려고하는게 아니라 이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고, 그 경험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분명하고 선명한 경험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정결’하게 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는 ‘식사’가 결코 부정한것이 아니라 ‘정결’한 것으로 바꾸셨다는 점이 강조된다. 우리는 이 환상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에서 ‘하늘’에서 내려와서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점을 주목해보게 된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만물 가운데 충만하신 충만으로 교회와 우리를 채워가시는 것을 ‘성령충만’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만물 가운데 충만하신 충만’으로 이방인들조차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끌어가시는 분은 하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다.
11 바로 그 때에 사람들 셋이 우리가 묵고 있는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내게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12 성령이 내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우리는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13 그 사람은, 자기가 천사를 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습니다. 곧 천사가 그의 집에 와서 서더니, 그에게 말하기를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불러오너라.
14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말씀을 일러줄 것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15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환상이 끝나자마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다. 이제 숫자가 더 분명하게 제시되면서 이 사건의 ‘증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강조된다. 욥바에 있었던 성도들도 여섯 형제가 이동했으며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에 순종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고, 고넬료 또한 천사를 본 이야기를 통해서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함으로써 이 만남의 주선자가 성령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것도 성령님이시다. 베드로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처럼, 즉,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처럼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경험했다. 그들이 ‘방언’ 한 것이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로마 말로 말한 것을 베드로와 욥바 사람들이 복음 선포로 번역하여 들었는지, 아니면 신비로운 말을 했는지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방인들에게도 ‘오순절’ 성령임재와 같은 사건이 동일하게 일어났다는 사실만이 강조된다.
16 그 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1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성령님의 임재를 보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이제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방인’들에게 벌어졌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이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토를 달 필요가 없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가 베드로는 반문한다.
여기까지 베드로의 발언이 이어졌다. 우리는 다시 요나의 이야기를 떠올려볼 것이다. 요나의 맨 마지막 구절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라고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으로 끝난다. 그에 대한 답변은 요나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 답은 ‘독자’가 하게끔 되어있다. 오늘 본문은 요나와 동일한 질문으로 베드로의 말이 끝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니느웨를 아끼시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교회와 동일한 선물을 주셨다. 요나의 생략된 답을 베드로와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이 하셨으니 선하고 아름답습니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토를 달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토를 달곤한다. 요나처럼 그것이 옳습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분을 내어도 정당합니다 부르짖는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도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 질문해보면 그리 쉽지 않은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 묵상하면서, 그 참된 순종이 일어나길 위해서 기도하자. 우리는 요나처럼 ‘분노’하며 불순종하는 길이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인정하고 순종하며 더 넓은 주님의 교회가 확장됨을 기쁨과 감사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줄 믿는다. 이 유연함과 순종이 우리를 ‘충만함’으로 이끌어갈줄 믿는다. 이 충만함이 우리 안에 일어나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