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환이 터졌거나 음경이 잘린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2 사생아도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하고, 그 자손은 십 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그 자손은 십 대가 아니라, 영원히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4 그들은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와서 당신들을 맞아들이기는커녕, 당신들을 저주하려고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브돌에서 그를 불러온 사람들입니다.
5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습니다.
6 당신들은 당신들의 평생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번영하거나 성공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7 당신들은 에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당신들의 친족입니다. 이집트 사람을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들이 그들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8 그들에게서 태어난 삼 대 자손들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공동체가 온정과 보살핌을 행하며, 약자와 소외자들을 위한 보호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매우 단호하게 배타적인 공동체 그룹을 설정한다. 분명히 이스라엘 공동체는 사랑과 온정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 차별성과 정결을 보호할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하며 하나라도 소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공동체가 가져야할 차별성과 환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더불어 하나님의 환대하심이 이 배타적 공동체가 어떻게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기에 인간의 공동체가 얼마나 끔찍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혀진다.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고환이 터지고 음경이 잘린 사람, 사생아, 암몬 사람, 모압 사람이다. ‘고자’는 생명을 이을 수 없다는 점에서, 사생아는 허락되지 않은 가정 안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암몬과 모압 사람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막았기 때문에 총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거부된다. 모든 외국인이 다 거부되는 것은 아닌데, 에돔은 친족 계열 민족이어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환대했던 경험적 이유 때문에 손자 이후로 총회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
9 “당신들이 진을 치고 적과 맞서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악한 일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10 당신들 가운데 누가 밤에 몽설하여 부정을 탔을 때에, 그 사람은 진 밖으로 나가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11 해가 질 무렵에 목욕을 하고, 해가 진 다음에 진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12 당신들은 진 바깥의 한 곳에 변소를 만들어 놓고, 그 곳에 갈 때에는,
13 당신들의 연장 가운데서 삽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용변을 볼 때에는 그것으로 땅을 파고, 돌아설 때에는 배설물을 덮으십시오.
1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의 대적들을 당신들에게 넘겨 주시려고, 당신들의 진 안을 두루 다니시기 때문에, 당신들의 진은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들 가운데로 다니시다가 더러운 것을 보시면 당신들에게서 떠나시고 말 것이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신들의 진을 성결하게 하십시오.”
이어지는 명령은 의식적 정결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청결은 경건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의식적인 정결을 유지하고 진영은 깨끗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물론 진영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는 현대에서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뼈저리게 느꼈지만 그런 과학적 근거가 아니더라도 이런 진영의 청결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게 된다. 즉, 영적인 거룩은 ‘환경적 청결함’과 떼어낼 수 없다. 영적 거룩성과 환경적 청결함은 ‘육체적 건강’을 증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진영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들은 영적,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 건강- 전인격적 정결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15 “어떤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당신들에게로 도망하여 오거든, 당신들은 그를 주인에게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16 성 안에서 그가 좋아하는 곳을 택하게 하여, 당신들과 함께 당신들 가운데서 살게 하여 주고, 그를 압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17 이스라엘의 딸은 창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습니다.
18 창녀가 번 돈이나 남창이 번 돈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성전에 서원을 갚는 헌금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노예제도를 허락하고 권장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따라오겠지만, 본문은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와 전혀 다른 개념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들어 로마의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나 영국을 포함해 유럽에서 있었던 끔찍한 흑인 노예들을 다루는 악독한 백인 노예상을 떠올리는 것은 본문에 부합하지 않는다. ‘종’이라는 말은 폭넓은 사회적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노비와 사노비의 차이,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차이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움’의 강도가 다르고 노비와 ‘천민’이 같이 쓰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천민’이 노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종’이라는 말이 천편일률적인 학대받는 노예를 상정할 수는 없고 일부의 경우 부당하고 잔인한 주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인을 피하여 도망친’ 종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이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신분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이런 조치는 노예 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나의 사회 제도로써 노예제도가 용인, 또는 묵인 되더라도, ‘약자’의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약속의 땅 주민이 가지는 보호의 권리가 상위법으로 인정되어 더 높은 도덕적 수준에서 도망친 노예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이 당시의 기준에서 얼마나 파격적인 명령이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어지는 명령은 몸을 파는 남녀에 관련한 명령이다. 여기에서의 명령이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행위를 전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이교신전에 있었던 제의적 창녀, 남창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전반적인 매춘 자체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서원을 갚는 헌금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제의적, 예배 형식에서의 매춘을 금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명기의 제의적 율법들이 보여주는 정결함의 요구들은 우리의 시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분명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율법이 어떤 ‘기준’이 되어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변할 수 없는 기준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얼마나 많은 세리와 창기가 돌아왔는지를 들어볼 수 있다. 바울을 통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며 말했던 이야기를 알고 있고, 이후의 그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떠올릴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이방인이자 고자였던 에티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고 주님의 교회 일원이 된 이야기를 알고 있다. 정결함과 청결을 그토록 강조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형벌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드셨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명령들은 얼마나 우리 인간이 더러운 존재인지를 반증해주는 것들이며,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기에 약점이 많은지 보여준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벌리신 십자가 위의 두 팔 안으로 들어갈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무한한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환대는 제한없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닮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환대의 교회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