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무렵에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성문 어귀에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느냐?
4 성 안으로 들어가 봐도 성 안에는 기근이 심하니, 먹지 못하여 죽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여기에 그대로 앉아 있어 봐도 죽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시리아 사람의 진으로 들어가서 항복하자.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면 사는 것이고, 우리를 죽이면 죽는 것이다.”
5 그리하여 그들은 황혼 무렵에 일어나서 시리아 진으로 들어갔는데, 시리아 진의 끝까지 가 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곳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6 주님께서 시리아 진의 군인들에게, 병거 소리와 군마 소리와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에, 시리아 군인들은, 이스라엘 왕이 그들과 싸우려고, 헷 족속의 왕들과 이집트의 왕들을 고용하여 자기들에게 쳐들어온다고 생각하고는,
7 황혼녘에 일어나서, 장막과 군마와 나귀들을 모두 진에 그대로 남겨 놓은 채,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하였던 것이다.
본문은 ‘나병 환자 네 사람’을 등장시킨다. 우리는 시리아와 나병 환자를 연결하며 나아만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으로 말도 안되는 기적을 너무나 쉽게 경험하게 되는 예시를 또 하나 듣게 될 것이다.
나병 환자들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이 전쟁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보급인데, 먹을 것이 사라져서 아이들까지 잡아먹는 상황이니 이미 물자가 없는 상황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패할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차라리 포로가 되기를 선택한다. 포로의 상황에서 죽어도 굶어 죽음으로 죽는것과 마찬가지라고 판단한다.
우리는 ‘황혼 무렵’이라는 점과 시리아 군인들이 연합전선을 펼친 이스라엘 왕과 동맹국들의 쳐들어옴을 두려워해서 도망갔다는 ‘착각’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3장의 모압 정벌 사건을 떠올려볼 수 있다. 3장의 모압 사건은 이스라엘, 유다, 에돔의 연합국이 ‘아침’에 태양에 비친 물웅덩이를 피라고 ‘착각’하고 도망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자면은 ‘황혼’에 연합군들이 ‘소리’를 착각하여 도망친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전쟁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인간적으로 결코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초자연적인 현상,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로 말미암아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8 이들 나병 환자들이 적진의 끝까지 갔다가, 한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먹고 마신 뒤에, 은과 금과 옷을 가지고 나와서 숨겨 두고는, 또 다른 장막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도 물건을 가지고 나와, 그것도 역시 숨겨 두었다.
9 그런 다음에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날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고 내일 아침 해 뜰 때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오히려 우리에게 내릴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왕궁으로 가서, 이것을 알리도록 하자.”
10 그리하여 그들은 성으로 돌아와, 문지기들을 불러서 알려 주었다. “우리들은 지금 시리아 진에서 오는 길인데, 그 곳엔 사람은커녕 인기척도 없으며, 다만 말과 나귀만 묶여 있을 뿐, 장막도 버려진 채 그대로 있습니다.”
11 이 말을 들은 성문지기들은 기뻐 소리치며, 왕궁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나병환자들은 적진 전체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먹고 마신뒤에 은과 금과 옷을 숨겨둔다. 우리는 또 다시 나아만 장군이야기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게하시를 떠올릴수밖에 없는 그들의 행위는 그러나 게하시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결과를 다르게 비튼다.
그들은 이런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전하기로 결정한다. 성으로 들어와 문지기들에게 사실을 보고하고 성문지기들은 기뻐서 소리치며 왕궁에 사실을 보고한다. 사실 이들이 어떻게 빠져나갔고 어떻게 되돌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오는 왕의 의심이 당연히 이해될만하다. 그들이 몰래 빠져나갔고, 되돌아온것이 첩자 역할이라면 성문을 여는 순간 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12 왕은 밤중에 일어나서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시리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한 것이 무슨 뜻이겠소. 내 생각에는, 그들이 분명 우리가 못 먹어 허덕이는 줄 알고 진영을 비우고 들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성 밖으로 나오면 우리를 생포하고, 이 성 안으로 쳐들어오려고 생각한 것 같소.”
13 그러자 신하 가운데 하나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 성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다섯 필의 말은, 이 성 안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굶어 죽고야 말 것이니, 이 말에 사람을 태워 보내어서, 정찰이나 한번 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4 그래서 그들이 말 두 필이 끄는 병거를 끌어내니, 왕은 그들을 시리아 군의 뒤를 쫓아가도록 내보내면서, 가서 알아 보라고 하였다.
15 그들이 시리아 군대를 뒤따라 요단 강까지 가 보았지만, 길에는 시리아 사람들이 급히 도망치느라 던져 버린 의복과 군 장비만 가득하였다. 군인들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16 그러자 백성들은 밖으로 나가서 시리아 진영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신하들과 의논하며 이 사건을 의심한다. 첩자의 역할일 수 있고 돌아가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급변할 이유가 없으니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매복이 염려될수밖에 없다. 그러나 ‘합리적 생각’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결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신하들은 왕의 의심에 어차피 전쟁의 양상이 굶어죽는 비참한 결말이 예상되는데 마지막으로 정찰이라도 나갔다 올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당시의 관점에서 모든 도성의 것이 왕의 것이었겠지만, 그 성에 말이 겨우 다섯필밖에 없었다는 것은 왕의 개인소유인 말 밖에 없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왕은 병거를 끌어내서 정찰을 나가도록 시킨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돌아와 보고한다. 이미 그 사이에 나병환자들로부터 백성들은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뛰쳐나가 시리아 진영을 약탈했다. 군인들의 보고는 더욱 재빠르게 약탈을 하도록 만드는 신호탄일 뿐이었다.
17 그래서 왕은 자신을 부축한 그 시종무관을, 성문 관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아 죽였는데, 왕이 그의 부축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고 왔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그대로 그가 죽은 것이다.
1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내일 이맘때 쯤이면 사마리아 성 어귀에서는,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거래할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에,
19 그 시종무관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비록 주님께서 하늘에 있는 창고 문을 여신다고 할지라도,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하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당신은 분명히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것이오.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20 그래서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며, 그가 성문 어귀에서 백성에게 짓밟혀 죽은 것입니다.”
무분별한 약탈행위는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썰물처럼 도성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분명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게 될 것처럼 느껴졋을 것이다. 따라서 왕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시종무관을 성문관리로 삼는다. 그런데 오히려 이 시종무관의 통제시도가 백성들의 굶주림을 막지못하고 밟혀죽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모든 일이 겨우 하루만에 일어났다.
끔찍하고 비극적인 현실도 하나님의 일하심 한번이면 단숨에 모든 것이 역전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볼 때, 그것을 실재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의심을 위한 의심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결코 취할 수 없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런 의심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왕과 시종무관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신들의 행태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엘리사에게 돌리고, 그에게 책임을 물어 죽이려한다.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배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사를 보호하심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너무나 허무하고 어이없어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일으키신다.
복음은 지혜로운 자들에게 감추시고, 미련한 방법, 어리석은 것으로 제공된다. 예수를 믿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즉시, 반드시, 철저한 변화와 회심으로 나타나게 만드는가? 의심한다면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을 위한 의심으로 아예 믿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이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있으면서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찾고 확인하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이 미련해보이는 방법, 아무것도 아닌 방법, 십자가의 도를 따라 나서는 방법으로 풍성하고 놀라운 구원은 제공된다.
오늘 이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를 경험하는 약속의 땅 주민들처럼 우리에게 그 놀라운 역전의 은혜, 풍성하고 풍요로운 은혜가 ‘복음’으로 온전히 경험되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