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 이름을 함부로 일컫는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의 기초가 ‘사랑’이라고 나눠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한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당시에 영적인 존재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의미를 갖기도 했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명령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도구화 시키려는 모든 시도들도 원천 차단한다. 결코 그런 일은 용납될 수 없다.
12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은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한 것이다.
13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4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안식일이 거룩하게 지켜진다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완전한 쉼’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 해석에 돌입하기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해봤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천지를 육일동안 창조하시고 칠일에 쉬셨다. 하나님이 피곤하시거나, 힘드셔서 쉬셨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목적은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것을 누리고 즐기시는 것이었다. 따라서 안식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와 운영을 깊이 느끼고 인정하고 누리고 즐기는 것이다. 이집트의 종살이하던 때는 결코 쉼이 없는 무한한 노동만이 있다. 그 노동은 이집트의 황제를 섬기기 위함이며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더욱 고된 노동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이집트에서 빼오신 이후에 그들이 해야할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은 세속의 왕들을 위한 쉼없는 노동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다스리심에 대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은 우리의 불안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라는 부름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만족하지 못해 또 다시 노동의 굴레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 하는 행위가 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죄없다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16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출애굽 2세대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해보라. 그들의 부모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들이 ‘부모’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부모’ 공경과 약속된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는 말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모로 부터 받은 ‘언약’의 말씀을 얼마나 성실하게 전달해야 하는가의 책임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들어야 한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치 호렙산에 자신들이 있는 것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언약의 장소로 인도될 것이다. 부모의 권위는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인도할때 생긴다.
17 살인하지 못한다.
18 간음하지 못한다.
19 도둑질하지 못한다.
우리는 함무라비법전같은 고대의 법조문들에서도 이런 일반적 도덕률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인간으로써 당연하게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얼마나 확장적으로 적용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단지 ‘도덕적 관점’에서 십계명을 읽을 수 없다. 예수님은 형제를 향해 바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살인하는 것이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것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절대적 기준’이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의도와 동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살인, 간음, 도둑질같은 율법이 우리 시대에도 얼마든지 재해석되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의 명령에 따르기 간절히 원하는 참된 신자라면 인터넷 공간에서의 ‘악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온갖 음란물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저작권과 소유권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율법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완성시키신 예수님 안에서 얼마든지 확장되고 재해석 되어 지켜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20 이웃을 모함하는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21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이웃의 집이나 밭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
거짓증언과 탐욕으로 이웃의 것을 빼앗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땅에 들어가 살 때, 각자에게 허락된 경계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경계석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락하신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땅을 차지하겠다는 반역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것’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몇몇 경우에 어쩔 수 없이 토지가 매매되더라도 희년이 되면 원래 주인의 땅에게 돌아감으로써 자신의 세대에서 언젠가 한 번은 원래의 기회를 되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짓과 탐욕은 제대로된 희년을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두 가지의 계명은 극심한 우상숭배자와 결합한 예시를 보여주는데, ‘아합’이 그 대표이다. 그가 거짓 증인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장면, 바알 숭배자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얼마나 탐욕이 우상숭배와 쉽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십계명은 분명히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아가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언약’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함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행위들에 대한 가이드라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가이드라인을 완전히 무시하고 선을 넘어버리며 불순종과 탐욕의 우상숭배를 반복했다. 결국 하나님 사랑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십계명을 ‘도덕법’으로 접근할 때 너무나 편협한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욱 넓게 접근하며 사랑의 원리로 삶의 체계를 만들어가는 기초적인 재료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십계명에 담긴 내용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고, 그의 백성들은 사랑으로 반응할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들이다. 하나님 주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만날 때 발생하는 상태가 명령문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기본이며 더욱 많은 상황과 환경에서 이 원리에 따라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재구성해내야 한다. 우리 안에 이 계명들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자유를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제공되고있는짖 생각해보며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십계명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2.
십계명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복종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지켜질 것들이다.
3.
십계명에서 벗어나는 우상숭배와 탐욕이 결합할 때, 비참한 종말은 정해져있다.
4.
십계명은 기본일 뿐이며 더욱 확장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재구성해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