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였다.
2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엘리바스는 지금까지 참고 기다리고 듣고 있었다. 하지만 욥의 불평과 저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을 수 없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분명 계속된 대화 속에서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감정에서 완전히 무너진 한 인간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엘리바스도 그러한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엘리바스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친구들과의 긴 토론의 장면을 읽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대화의 핵심은 과연 누가 더 ‘지혜’로운가에 대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이 지혜는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설명하는 것이며 일관성있게 의견을 피력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친구들의 논점은 대동소이하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권선징악’이다. 친구들은 그것을 역으로 곧장 연결시키는 것도 참이라고 믿는다. 악이 벌어지는 이유는 죄를 지어서라고 결론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믿지만 친구들은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가며 욥을 압박할 것이다. 너의 고난에는 이유가 있고, 그것은 죄 때문이다. 회개해라.
3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4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5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
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엘리바스의 처음의 도입은 매우 정중하다. 욥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가에대해서 칭찬으로 시작한다. 본문은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대비가 보인다. 욥은 원래 힘 있는 자였다. 그래서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욥은 힘 있는자가 아닌 힘 없는자가 되버리고 말았다. 힘 없는 자는 다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엘리바스는 욥에게 ‘힘있는자’로 등장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혜를 베풀 것이다. 그런데 그 지혜는 참된 지헤인가? 독자는 엘리바스가 사실과 부합하는 지혜를 가르치려고하는가 질문하게 된다.
7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8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9 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들이다.
10 사자의 울부짖음도 잠잠해지고, 사나운 사자의 울부짖음도 그치는 날이 있다. 힘센 사자도 이빨이 부러진다.
11 사자도, 늙어서 먹이를 잡지 못하면, 어미를 따르던 새끼 사자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엘리바스의 논점이 선명하게 발견된다. 죄 없고 정직한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 하나님의 입김과 콧김에 부정하고 악한 것들이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악을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은 악을 뿌리채 뽑으시며 불가역적으로 승리하신다.
문제는 그것을 ‘역’으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에 관한 것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욥이 ‘악하기 때문에’ 뿌린 씨를 거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의 시작에서 욥이 악해서 받은 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적용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권선징악은 하나님 편에서 사실이지만, 인간편에서 경험적으로 추론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악을 관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자에 대한 이미지는 힘 있는 동물이 힘 없는 동물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결과이다. 사자는 종종 악한 나라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악한 사자가 겉으로는 강력해보여도 침묵할수밖에 없다. 욥이 강한 사람이었다 라는 표현과 연결해보면, 그가 대단한 실력자인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고 악한 사자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된다. 욥은 힘 없는 사람, 힘 없는 사자가 되었다. 주변의 새끼 사자들이 떠나듯이 사람들이 욥을 떠날 것이다. 이것은 욥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12 한번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 오는데, 너무도 조용하여 겨우 알아들었다.
13 그 소리가 악몽처럼 나를 괴롭혔다.
14 두려움과 떨림이 나를 엄습하여, 뼈들이 막 흔들렸다.
15 어떤 영이 내 앞을 지나가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16 영이 멈추어 서기는 했으나 그 모습은 알아볼 수 없고, 형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는데,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서 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17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뼈들이 흔들거릴 정도의 강렬한 임재를 표현함으로 신뢰할 수 있을만한 영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모습은 알 수 없고 형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을 때 소름끼치는 경험 속에서 두려운 진실을 듣는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고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
이 말은 직관적으로 진실이다. 그러나 내표하고 있는 이야기는 ‘욥’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다. 욥이 회개하지 않고 자신이 더 의로운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진리 앞에서 잘못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경험을 앞세워 진리를 포장해서 욥의 진실을 왜곡한다. 종교적인 진실이 인간의 입을 통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18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들까지도 믿지 않으시고, 천사들에게마저도 허물이 있다고 하시는데,
19 하물며,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사람이겠느냐?
20 사람은, 아침에는 살아 있다가도, 저녁이 오기 전에 예고도 없이 죽는 것, 별수 없이 모두들 영원히 망하고 만다.
21 생명 줄만 끊기면 사람은 그냥 죽고, 그 줄이 끊기면 지혜를 찾지 못하고 죽어간다.”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완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의 피조물들조차 완전함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천상적 존재’보다 인간이 우월할 수 없다는 인식 속에서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상적 존재보다 못한 인간이 과연 완전할 수 있느냐는 반증이다. 인간의 하찮은 목숨을 표현하면서 흙으로 만든 몸, 하루 살이에라도 눌려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과장과 사실을 넘나드는 표현들로 결론내려지는 것은 ‘생명줄’이 끊기면 [지혜]를 찾지 못한고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의 주제는 과연 누가 지혜로운가 이다. 영적인 존재의 지혜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지헤는 허무하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이 그런 짧은 지혜로 하나님께 항변하지 말고 자신이 당한 결과물이 있으니 자신의 악을 색출하고 발굴해서 회개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엘리바스의 논증에 마음과 생각을 빼앗길 수 있다. 만약 욥이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았던 사실이 없었다면 엘리바스의 논점을 비판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므로 인간이 당한 끔찍한 재앙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곧장 연결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로암 망대에 죽은 사람들의 예를 드셨던 것처럼 그들이 죄가 있어서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우리가 함부로 하나님의 악의 제어하심을 ‘인간적 관점’에서 모두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판데믹 시기에, 현대에 일어나느 수많은 끔찍한 재앙들에 대해서 함부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잣대를 들이밀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비판할 때 우리는 엘리바스가 된다. 종교적으로, 원리적으로는 옳지만, 그렇다고 진실과 가까운지의 여부는 오로지 하나님만 아신다.
가장 선명한 예가 ‘예수 그리스도’ 시다. 그분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왜 그것을 허용하셨는지는 ‘부활’로써만 설명가능했다. 부활 이전의 고통은 모든 욥들에 대한 변호이다. 죄가 없음에도 고통 당할 수 있다. 심지어 천사보다 우월하신 우리 주님도 그러셨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 너머 우주적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시선에서 반드시 권선징악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겸손해야 한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으며 우리를 도우시고 붙들어달라고 기도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포인트
1.
하나님만이 참된 권선징악을 행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2.
인간 편에서 모든 인과율을 이해할 수는 없다.
3.
오히려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지혜로운 것이다.
4.
최후의 순간 하나님만이 선하셨음을 나타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