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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하나님의 주권과 과정 / 욥기 34:1–30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말하였다.
2 지혜를 자랑하시는 어른들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자부하시는 세 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어른들께서는 음식을 맛만 보시고도, 그 음식이 좋은 음식인지 아닌지를 아십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은 들으시고도, 잘 깨닫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4 이제는 우리 모두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아보고, 진정한 선을 함께 이룩하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욥 어른은 이렇게 주장하십니다. “나는 옳게 살았는데도, 하나님은 나의 옳음을 옳게 여기지 않으신다.”
6 또 욥 어른은 “내가 옳으면서도, 어찌 옳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나는 죄가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엘리후는 세 친구들 사이에 선다. 그가 중재자로써 하나님과 욥 사이에 서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듯, 이제 친구들 사이에 서서 욥의 말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들으라고 요청한다.
엘리후는 음식맛처럼 1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처럼 지혜도 그렇게 판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그저 느낌만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 직관적인 앎에 따라 진정한 선을 함께 찾아보자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욥의 발언들을 되돌아보면서 욥이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꼬집어 인용한다. 엘리후는 욥이 죄 없다 라는 주장을 반박할 것이다.
7 도대체 욥 어른과 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을 물 마시듯 하고 있지 않습니까?
8 그리고 그는 나쁜 일을 하는 자들과 짝을 짓고 악한 자들과 함께 몰려다니면서
9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 해도, 덕볼 것은 하나도 없다!” 하고 말합니다.
엘리후의 발언은 굉장히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쁜 일을 하는 자들과 짝을 짓고 악한자들과 함께 몰려다닌다고 말한다. 욥이 정말 그랬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엘리후의 이런 발언은 어떤 의미인가? 시편 1편의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 발언들은 욥이 지혜없는 인간이며 결코 열매 맺은 일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욥은 자신이 받은 모든 혜택들이 사라진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이란 없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런 논리의 기초에서 욥을 모함하고 있다.
10 분별력이 많으신 여러분은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악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분께서 옳지 않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11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이 한 일을 따라서 갚아 주시고, 사람이 걸어온 길에 따라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12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일이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13 어느 누가 하나님께 땅을 주관하는 전권을 주기라도 하였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것을 맡기기라도 하였습니까?
14 만일 하나님이 결심하시고, 생명을 주는 영을 거두어 가시면,
15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은 일시에 죽어,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엘리후는 욥의 악한 발언에대해 하나님을 변호하면서 하나님께서 옳지 않으신 일을 하실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일만 하실 수 있다.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욥의 반응은 틀렸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모든 전권을 가지셨고 그 전권을 인간에게 주신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가시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따라서 욥이 제아무리 항변하고 따져물어도 하나님의 잘못을 지적할 자격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권한 아래 있는 것들이다.
16 욥 어른, 어른께서 슬기로우신 분이면, 내가 하는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17 욥 어른은 아직도 의로우신 하나님을 비난하십니까? 하나님이 정의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18 하나님만은 왕을 보시고서 “너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하실 수 있고, 높은 사람을 보시고서도 “너는 악하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19 하나님은 통치자의 편을 들지도 않으시고, 부자라고 하여, 가난한 사람보다 더 우대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손수 이 사람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처럼 존귀한 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높은 사람에게도 ‘악하다’ 라고 평가를 내리시는 것이 결코 문제가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던 ‘토기장이’의 비유나 사도 바울이 인용했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인되심으로써 가치 평가를 우리가 내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20 사람은 삽시간에, 아니 한밤중에라도 죽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치시면, 사람은 죽습니다. 아무리 힘센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간단히 죽이실 수 있습니다.
21 참으로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시며, 그의 발걸음을 낱낱이 지켜 보고 계십니다.
22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은 없습니다. 흑암 속에도 숨을 곳이 없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곳에도 숨을 곳은 없습니다.
23 사람이 언제 하나님 앞으로 심판을 받으러 가게 되는지, 그 시간을 하나님은 특별히 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24 하나님은 집권자를 바꾸실 때에도, 일을 미리 조사하지 않으십니다.
25 하나님은 그들이 한 일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하룻밤에 다 뒤엎으시니, 그들이 일시에 쓰러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의 생명에도 미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설명한다. 하나님은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간단히, 한 밤중에라도 죽게 만드실 수 있다. 그 시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서 악인들의 시간을 언제라도 끝내실 수 있다. 따라서 죄인들은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기전에 어서 빨리 회개하는 편이 낫다.
이로써 엘리후의 숨겨진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욥은 악인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 이르르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닿기 전에 어서 빨리 회개하는 편이 낫다. 하나님은 숨겨진 의도와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므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욥의 의로운 행동들과 다르게 숨겨져있는 모든 의도들도 다 아실 수 있는 분이시므로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숨겨진 의도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명명백백히 드러내실 것이다.
26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악인들을 처벌하십니다.
27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던 길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어느 길로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28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하나님께 다다르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그분께 들리는 것입니다.
29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여, 누가 감히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숨으신다고 하여, 누가 그분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30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고집 센 민족과 백성을 다스리게 하신들,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들을 처벌하시는 일,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는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왜 그렇게도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시는지 불만스럽게 따졌지만, 엘리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죄인들을 처리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엘리후는 욥의 발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말들을 들어 조목조목 비판해나간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주권자이신 분께 못마땅한 원망을 쏟아내는 것은 ‘죄’일 뿐이고 빨리 회개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엘리후의 발언에서 틀린말을 찾아내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인정할수밖에 없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욥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부분 또한 하나님께 지적받는 부분이므로 엘리후의 지적은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스럽게, 엘리후가 ‘의심스러운 영성가’ 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엘리후의 입장은 ‘사탄’의 입장과 비슷해보인다. 사탄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겠는가?’ 질문했던 것처럼, 엘리후는 욥이 ‘복이 없으니 하나님을 저주한다’고 지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욥은 주신이도,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 복의 유무, 형통함의 유무가 찬양과 경배의 원동력이 아니다. 다만 욥의 절규는 ‘억울함에 대한 신원됨일 뿐이다.
옳은 신학이 때로 ‘결과’만 가지고 과정을 왜곡시킨다는 점을 지적했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하실꺼라는 ‘결론’만을 중요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신앙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다. 하나님 주권의 강조는 반드시 필요한 논리이지만, 그 주권을 가지신 분께서 가장 비참한 과정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정말 불필요해보이는 과정을 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본질적인 진리를 인정함과 동시에, 우리의 과정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온전히 씨름되어 이루어지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사람의 생명과 죽음,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
2.
고통스러운 결과가 정해진 것이 ‘죄’에 대한 원인으로 곧바로 연결할 수는 없다.
3.
우리는 결론만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4.
하나님의 주권의 따른 최종적 결론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의 과정 모두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