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시는데,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3 간곡히 청하였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맞은 편으로 건너오셨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종종 가르치셨다. 그런 점을 생각할 때 장소적 배경은 다시 가버나움일 것이다. 또 우리에게 익숙한 ‘큰 무리’가 모여든다. 이로써 또 다른 기적의 사건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만나 엎드려 간청한다.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기 때문에 손을 얹고 고쳐주셔서 살려 달라고 요청한다. 지금 딸의 상태는 ‘죽어가는 중’이다.
야이로의 딸은 육체적으로 죽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죽어 있는 또 다른 딸을 만나신다.
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어댔다.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예수님과 야이로, 제자들이 큰 무리에 휩싸여 이동하고 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리저리 밀리고있는 중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삽입된다. 아직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혈루증 걸린 여인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두 이야기는 동시에 진행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될 것이다.
여인은 여러 의사에게서 많이 고생을 당했고, 재산도 없어졌지만 아무 효력도 없이 상태는 더 악화된 상황이다. 그녀가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상태라면, 그녀의 신체적인 건강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녀는 ‘부정한 상태’로 이해되어 모든 접촉이 금지되었을 것이므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된 처지였을 것이다. 그녀의 악화된 상태는 신체적 상황만 이야기하지 않고 전인격적인 상태의 악화를 이야기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9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우리는 이전의 본문들에서 예수님께서 손을 대셔서 낫게 만드신 예시들을 충분히 참고할 수 있다. 그 ‘소문들’은 분명히 유명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인도 ‘손을 대기로’ 작정했다. 여자는 이 ‘만지는 일’을 꽤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 같다. 이미 그 생각은 이전부터 계속 해오고 있었다.
이 만짐을 통해서 출혈은 곧 끝나고 낫게 되었다. 이 터치로 인한 나음은 ‘몰래’ 감행하려고 했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간 사실을 아셨고,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질문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질문은 ‘의도적’이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모르셨을리가 없다. 그러나 숨어있는 그녀를 드러냄으로써 이 행렬의 이야기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제자들의 만류는 충분히 이해된다. 회당장의 딸은 죽어가고있고 매우 긴급한 상황이라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게다가 무리가 에워싸고 떠미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의 터치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누가 만졌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모든 사람이 다 만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기까지 하신다. 일행의 초조함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시다. 지금의 관심사는 한 영혼이다.
결국 여인은 ‘두려워하며 떨면서’ 나와 사실대로 말한다. 그녀가 두려워할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부정’을 전가한것이나 마찬가지인 접촉은 분명히 두려울만한 사유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지적하시며 그 믿음이 낫게 만들었다며 안심하고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딸’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그녀는 지금 ‘딸’이다.
왜 딸인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구약에서 종종 사랑하시는 딸로 표현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은 살아있지만 생식이 불가능한 상태, 미래가 없는 상태이며 병들어있는 상태이다. 생명력을 잃고 점점 더 나빠져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진 후 ‘딸’은 회복된다. 예수님을 만질 때 소망이 있다. 이제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보러 가실 차례다. 그러나 회당장의 딸은 더욱 심각한 상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상황은 변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만지는 삶’일 때 분명히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짐’의 행위로 치유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셨음을 기억하자. ‘만짐’까지 필요한 믿음의 모험과 과정이 중요했다.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 믿음의 모험을 결단하고, 주님을 만짐으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길 소망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