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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억울한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 / 신명기 21:1–23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주검이 들에서 발견될 때에는,
2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현장에 나가서, 그 주검 주위에 있는 성읍들에 이르는 거리를 재십시오.
3 그 주검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 있을 터이니, 그 성읍의 장로들은 아직 멍에를 메고 일한 적이 없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4 물이 늘 흐르는 골짜기, 갈지도 심지도 않은 골짜기로 그 암송아지를 끌고 내려가, 물가에서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서 죽이십시오.
5 그 때에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으로서, 모든 소송과 분쟁을 판결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시대의 눈을 통해서 읽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눈으로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들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발전된 과학과 수사 기법, 사회적인 인프라와 범죄 심리 연구 등을 가진 우리 시대의 시각에서 본문의 이야기는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주술행위’ 정도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핵심은 무죄한 자에 대한 ‘책임’이 공동체에게 있다는 것이 확인되며, 그 거룩한 땅에 벌어진 부정함을 정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이 뒤따른다는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본문은 하나님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미상의 살인사건이 벌어진 사건을 전제한다. 그때에 장로들과 재판관들은 가장 가까운 성읍과의 거리를 재야 한다. 고의적인 사건이든, 비고의적인 사건이든 시신을 유기하려는 상황에서는 벌어진 현장에서 멀리가는 것보다 재빠르게 유기하는 것이 범죄자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가장 가까운 성읍에 두려 했을 것이다.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아직 멍에를 멘 적 없는, 물이 늘 흐르는, 갈지도 심지도 않은 골짜기]를 찾아야 한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는 것도 일종의 ‘정결례’에 속하는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 목을 꺾어 죽임으로써 살인사건을 재연하고, 늘 흐르는 물에 의하여 씻겨져 내려가도록 함으로써 오염된 땅을 정결하게 만드는 의식을 행한다. 그만큼 그 땅의 거룩함과 정결함은 중요한 요소였다.
6 이 때에 피살자의 주검이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물가에서, 목이 꺾인 암송아지 위에 냇물로 손을 씻고,
7 아래와 같이 증언하십시오. ‘우리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이 사람이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8 주님, 주님께서 속량하여 주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에게 무죄한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들은 살인의 책임을 벗게 됩니다.
9 이렇게 해서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지워진 살인의 책임을 벗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물가에서 손을 씻고 자신들과는 이 사건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이 사건의 죄책 사유가 ‘공동체’에 돌아가지 않도록 만든다. 이렇게 미결사건이 된 살인사건은 이제 ‘하나님’ 손에 돌아간다. 그 땅의 주민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은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판단을 맡겨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 일을 벌인 살인자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땅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땅에 흐른 무죄한자의 피가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10 “당신들이 적군과 싸울 때에,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적군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 주셔서 당신들이 그들을 사로잡았을 때에,
11 그 포로들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아리따운 여자가 있으면 그를 아내로 삼아도 됩니다.
12 그 여자를 아내로 삼을 남자는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깎고,
13 잡혀 올 때에 입었던 포로의 옷을 벗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집 안에 있으면서, 자기의 부모를 생각하면서 애곡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동침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부가 됩니다.
14 그 뒤에 그 여자가 더 이상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여자의 마음대로 가게 하여야 하며, 돈을 받고 팔아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 그 여자를 욕보였으므로, 종으로 팔아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기준에서 여성에 대한 대우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다만,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얼마나 진보적으로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율법에서 여성 전쟁 포로는 네 가지 차원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1.
강간당하거나 첩이나 종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아내로서 온전한 지위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2.
새로운 거처에서 안전하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애곡’할 시간도 주어져야 한다.
3.
성관계에 있어서도 애곡과 적응기간이 끝날때까지 제한을 둠으로써 철저히 여성을 ‘강제 착취’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4.
여성이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면 여성은 자유인으로 나와야하며 돈을 받고 파는 노예취급당해서는 안된다.
15 “어떤 사람에게 두 아내가 있는데, 한 사람은 사랑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사랑받는 아내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가 다 같이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의 아들일 경우에,
16 남편이 자기의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 주는 날에,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에게서 난 맏아들을 제쳐놓고 사랑받는 아내의 아들에게 장자권을 줄 수는 없습니다.
17 반드시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의 아들을 맏아들로 인정하고, 자기의 모든 재산에서 두 몫을 그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 아들은 정력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맏아들의 권리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앞서 여성 전쟁 포로를 보호하는 법과 연결되어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맏이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배’의 기업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는 원칙들이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 낳은 아들이 맏이라면, 그 여인의 아들이 받아야 할 상속이 다른 아들들에 비해 두 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려는 아버지의 시도가 있을 수 있다. 이 명령은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에대한 보호 뿐만 아니라 불공평한 사랑에 대한 아들의 보호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18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며,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아들이 있거든,
19 그 부모는 그 아들을 붙잡아, 그 성읍의 장로들이 있는 성문 위의 회관으로 데리고 가서,
20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우리의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 데다가 술만 마십니다’ 하고 호소하십시오.
21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당신들 가운데서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앞선 명령이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보호’였다면, 이 명령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심판이며 ‘부모’를 보호하는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불순종하고 방탕하고 술에 잠긴자여서 가족의 장래 경제적인 생존력과 번영을 위협하고 있을 때, 이 아들은 마치 우상숭배자처럼 돌로 쳐서 죽이는 가장 끔찍하고 충격적인 방법으로 죽여야 한다고 명령한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기억해볼 수 있다. 부모는 자녀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과 동시에 자녀들은 그런 언약적 백성으로 살아가는 부모에게 철저히 보고 배우고 복종함으로써 언약이 이어지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자녀들이 이 언약적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려할 때, 이 자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약속의 땅에 살아갈 명분을 스스로 버린 것이므로 부모, 자녀 관계에서의 보호차원을 넘어 ‘언약’적 차원에서의 형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2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합니다.
23 그러나 당신들은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으십시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저주받은 사람에 대한 명령에서 다시 땅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온다. 나무에 매달아 두는 처형되는 저주받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가져다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통치자는 이런 공포심을 자신의 힘으로 사용하고자하는 욕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욕구는 하나님께서 제어하신다. 하루 이상 매달아둘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것은 그 땅의 ‘거룩함’과 ‘정결’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죄한 자의 죽음, 전쟁 포로 여성의 보호, 사랑받지 못한 아들에 대한 여성과 아들에 대한 보호, 배역하는 아들에 대한 심판,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들었다. 우리 시대와 전혀 상관없는 명령으로 읽혀지며 지금 우리와 관계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명령들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어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기억해봐야한다. 예수님은 무죄한 자의 죽음으로 억울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멸시할 뿐 그들의 땅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거부했다.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리심으로써 저주받으신 분이 되셨는데, 그 이유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술 취한 방탕한 자’ 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신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분은 사랑받는 여자의 아들이 아니라 마을에서 ‘사생아’ 취급당하시며, 가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신 분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모든 명령들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감각한 자들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반대로, 이 모든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무죄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모두다 신원하시고 복구시키신다. 결국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이며, 율법의 완성이다. 이스라엘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유죄 판결을 받아 마땅하며 스스로 파멸됨이 마땅했다.
이제 이 ‘버림받은 억울한 죽음’의 대표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생조차도 신원하시고 꺼내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법률적으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해 복구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의 신원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