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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모든 것의 회복 / 욥기 42:1-17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우주적인 악을 제어할 수 있는지,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관리하고 제거할 수 있는지 질문하셨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악을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관리하고 다스리실 것이다.
이 앞에서 욥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통은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도구일 뿐이지 징계나 심판의 확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로써 하나님께서 어떤 결론과 결과를 도출하시든지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있다.
이제 욥은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그동안의 논의들이 ‘지혜’에 대한 논쟁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욥의 반응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무지함’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욥의 원래의 목적에서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욥은 하나님께서 ‘설명’하지 않으시고 어디로 가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후에 보고 들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만큼 커다란 위로는 없다. 인간의 궁극적인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서부터 온다.
욥은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개’라고 번역된 단어의 용례는 지금의 논의와 비교했을 때 조금 이상하다. 마치 친구들의 이야기가 맞는 것처럼 되버린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주장한 것이 욥이 죄를 지었고 죄를 회개함으로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회개’라고 읽는다면 친구들의 말이 옳다는 것이므로 적절하지 않아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회개’는 ‘위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티끌과 잿더미는 지금 욥의 상황이다. 고통과 절망의 한계 상황이다. 그리고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 모든 끔찍한 고통 한 복판에 욥은 앉아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셨고, 대면하셨고,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악과 고통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욥이 얻을 수 있는 궁극적 위로였다.
7 주님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엘리바스와 두 친구에게 하나님께서 ‘분노’ 하신다. 이 분노는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진리를 다루는 방식이었다고 나눴었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했다. 그래서 옳은 ‘지식’을 전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참된 지식의 근거 위에서 하나님의 광대하신 다스리심의 본질은 꿰뚫지 못한채 피상적 도식으로 권선징악을 무리하게 욥에게 적용시켰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옳음을 끝까지 피력하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계속해서 달려나갔고 소송장을 쓰길 원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다’ 이것이 둘의 차이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축소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미련함이다.
여기에서 엘리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엘리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 친구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8절은 훌륭한 답변이 된다. 진짜 ‘중재자’는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은 사람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람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엘리후를 지정하지 않으신다. ‘욥’이 그들의 중재자다. 고통당하지만 끈질기게 하나님을 찾아 마침내 하나님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 참된 ‘위로’를 얻은 사람이 그들의 중재자가 될 것이다.
9 그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니, 주님께서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10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11 그러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그에게 돈을 주기도 하고, 금반지를 끼워 주기도 하였다.
욥의 회복은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회복은 정확히 ‘두 배’가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돌이키면 두 배의 물질적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적용하는 것은 친구들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되버리고만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을 실재로 다스리시고 관리하시며 복구실뿐만 아니라 더 넘치게 하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공식’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욥의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사항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욥이 자신을 공격했던 친구들을 정말로 ‘축복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욥을 향해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을 감행했던 이들을 위해 욥은 기꺼이 용서하며 예배했다. 그의 회복에 어쩌면 이 중재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는지 모른다. 이 중재자의 역할이 그 어떤 지혜보다 월등했다. 그리고 그 중재자의 역할이 가진 본질은 ‘사랑’이었다.
12 주님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13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14 첫째 딸은 여미마, 둘째 딸은 긋시아,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고 불렀다.
15 땅 위의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아버지는, 오라비들에게 준 것과 똑같이,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에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
17 욥은 이렇게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욥은 재물이 두배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하지만 재물은 결코 ‘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두배가 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생명이 한 번 이 땅에 태어나고 죽는 것은 ‘존재’를 삭제 시키지 않기 때문에 이전의 자녀들이 죽었더라도 욥에게는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생생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욥의 새로운 자녀들은 여전히 10명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20명의 자녀가 남아있을 것이다.
자녀들의 월등히 더 나은 모습은 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탁월한 아름다움과 당시의 기준에서 엄청난 유산을 받으며 살 수 있었던 공주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욥은 장수했다. 백사십년은 70이라는 완전수 결합의 두배를 이야기 할 것이다. 이로써 그의 수명 또한 두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 엔딩에서 욥의 완전하고 넘치는 복을 보면서 흐뭇하게 욥기를 덮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욥을 비극적으로 두지 않으시고 신원하셨고 억울함을 되돌이키셨다. 복도 주셨고 장수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은 다 주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하다시피 우리는 이 모든 결과물들이 아직은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타락하고 오염된 세계에서 풍요로움은 결코 영원한 지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일정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제한된 영역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욥이 중재자 역할을 통해서 ‘이 세상’ 속에서 회복을 경험했다는 설명이 어느정도 ‘한계’를 가진 회복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신 분, 우리의 모든 오류와 잘못을 용서하시며 기꺼이 자신을 재물로 드려 완전한 화해를 이루신분, 참된 지혜시며 궁극적인 악의 괴물, 사망을 무찌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무궁한 회복을 ‘이 세상’의 한계있는 것들이 아닌, ‘새로운 세상’의 영원한 것들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욥과 같은 두 배의 축복을 바라는 것은 친구들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삶’속에서 지금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영광스러운 것들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리라는 진짜 소망이다.
오늘 말씀 묵상하면서 이 최종적인 회복과 소망, 우리 주님의 오셔서 다스리시는 것을 ‘소문으로 듣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고 소망하면서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욥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위로’를 얻었다.
2.
욥은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물질과 관계를 포함한 전인격적 회복을 경험한다.
3.
두 배의 복은 하나님께서 더 나은 것들을 주셨다는 예시다.
4.
그럼에도 욥의 중재자로써 얻은 회복은 ‘한계’가 있다.
5.
진정한 중재자이신 예수 께서 주시는 우리의 회복은 한계가 없는 영원한 것들이다.
6.
최종적인 회복과 소망, 우리를 다스리시는 통치가 ‘소문으로 듣던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보게 될 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