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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엘리바스의 월권 / 욥 15:1-16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였다.
2 지혜롭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열을 올리며 궤변을 말하느냐?
3 쓸모 없는 이야기로 논쟁이나 일삼고, 아무 유익도 없는 말로 다투기만 할 셈이냐?
4 정말 너야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기도하는 일조차도 팽개쳐 버리는구나.
5 네 죄가 네 입을 부추겨서, 그 혀로 간사한 말만 골라서 하게 한다.
6 너를 정죄하는 것은 네 입이지, 내가 아니다. 바로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한다.
엘리바스는 욥의 지혜를 ‘열을 올리며 궤변’을 말하는 것이라고 평가하며 모욕한다. 원문은 ‘동풍’으로 표현되는 [뜨거운 바람]을 욥의 지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욥의 지혜는 모든 것을 시들게 만들고 말라버리게 만드는 뜨거움만 있다. 지혜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뜨겁기만 하고 모든걸 시들게 만든다면 그런 지혜는 불필요하고 무쓸모한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인간 욥은 스스로 정죄하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우리는 엘리바스와 다르게 욥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배경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욥의 억울함에 대해서 인지한 상태에서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현상만 보았을 때는 엘리바스의 이런 지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반응처럼 보인다. 엘리바스가 몰랐던 것은 오히려 자신이 틀렷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엘리바스는 스스로의 입이 자신을 정죄하고말았다.
7 네가 맨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기라도 하며, 산보다 먼저 생겨난 존재라도 되느냐?
8 네가 하나님의 회의를 엿듣기라도 하였느냐? 어찌하여 너만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느냐?
9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너 혼자만 알고 있기라도 하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그 무엇을 너 혼자만 깨닫기라도 하였다는 말이냐?
10 우리가 사귀는 사람 가운데는, 나이가 많은 이도 있고, 머리가 센 이도 있다.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든 이도 있다.
욥은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예시를 통해 자연 만물 속에서 파괴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시는데 인간에게는 죽음 이후의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엘리바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욥이 오래 산것도 아니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것을 지적한다.
고대 근동의 개념에서는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지혜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바스는 친구들중에 나이가 많고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든 사람도 있는데 그들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친구들이 근거로 내미는 것들을 보면 ‘전통’에 근거해서, ‘나이’에 근거해서 제시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변적인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진리는 가변적인것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오로지 변하지 않는 것 위에만 세워질 수 있다. 사람의 나이듦이 언제나 지혜롭지 못함은, 나이가 들수록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친구들이 ‘좁은 의미’에서 욥의 삶을 해석하려고 했다는데서 알 수 있다.
11 하나님이 네게 위로를 베푸시는데도, 네게는 그 위로가 별것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이 네게 부드럽게 말씀하시는데도, 네게는 그 말씀이 하찮게 들리느냐?
12 무엇이 너를 그렇게 건방지게 하였으며, 그처럼 눈을 부라리게 하였느냐?
13 어찌하여 너는 하나님께 격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하나님께 함부로 입을 놀려 대느냐?
지금까지의 장면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위로’를 베풀어주시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지금 하나님이 ‘위로’를 베풀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위로’란 무엇인가? 아마도 엘리바스는 친구들의 말들을 ‘위로’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다시한번 친구들의 진리전달체계를 생각해봐야한다. 그들은 ‘진리’라고 믿는 것들에 무한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확신을 곧장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권위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욥을향해 마치 ‘이단심문관’이 된것처럼 정죄하려고한다.
엘리바스가 정말 지혜있는 자였다면 이런 교만한 태도를 알아차리고 진리를 검증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근거로, ‘전통’과 ‘진리’라고 믿는 사실들을 전달하고 직접적용하는것만을 하려고 한다. 검증하려는 노력과 절차의 수고로움을 겪지 않는 이상 진리는 피상적이게 되고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14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15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마저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으신다. 그분 눈에는 푸른 하늘도 깨끗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16 하물며 구역질 나도록 부패하여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욥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더욱 자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엘리바스의 인간의 죄성에대해서 이야기한 부분은 욥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결론이 다른데, 욥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보자를 통해 죽임 당하기 전에 억울함이 회복되며 신원함을 입길바란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그 죄의 결과 생긴 고통스러운 환경을 벗어나려면 ‘죄’를 회개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사람은 엘리바스가 될 것임을 우리는 욥기의 결말부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왜 엘리바스는 회개해야만 했는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훌륭하게 잇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가진 지식과 진리체계를 욥에게 전달할 때, ‘하나님의 위로’라는 식의 신적 지식으로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월권이고 교만이었다. 하나님에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겸손에 대한 지식이 더욱 깊어질수밖에 없는데, 엘리바스는 이런 점을 상상조차 못한 것 같다.
우리가 사는 다원주의 시대에 진리는 타협없이 추구되고 지켜져야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 체계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철저히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에 입각한 삶의 체계를 세워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엘리바스의 예에서 살펴보고있는 것처럼 과도한 진리수호의 책임자로써의 자의식은 사람을 살리지못하고 오히려 ‘죽이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수밖에 없다. 너무 분명하고 선명한 지식과 날카로운 진리체계의 적용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수정보완해야함이 발견되었을 때 스스로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의 신학보다도 사람을 ‘살리는 신학’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말씀 묵상하면서 오만한 ‘앎’을 버리고 겸손한 앎을 선택하며 참된 겸손의 왕, 지혜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길 원한다고 기도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엘리바스는 친구들의 말이 ‘하나님의 위로’라고 믿는 것 같다.
2.
친구들의 말은 진실이지만 ‘헤세드’가 없었다.
3.
하나님은 친구들이 틀렸다고 말씀하신다.
4.
진리는 겸손함에서 추구되며 유일한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