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QT] 주님의 나타나심 / 사도행전 21:37–22:11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37 바울이 병영 안으로 끌려 들어갈 즈음에, 그는 천부장에게 “한 말씀 드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천부장이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오?
38 그러면 당신은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키고 사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하고 반문하였다.
39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의 유대 사람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40 천부장이 허락하니, 바울은 층계에 서서, 무리에게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하였다.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을 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집트 출신의 거짓 선지자가 3만명의 사람을 모으고 광야를 통과해 감람산으로 진격했다. 그곳에서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성으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를 무찌르고 백성의 통치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로마는 애굽인 2백명을 사로잡고 4백명을 죽인다.
바울은 다소 사람으로 그리스어, 아람어, 히브리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오늘 천부장은 ‘그리스’말을 할줄 아느냐고 질문하고 사천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사람을 언급한다. 요세푸스가 기록하는 그 사람일 것이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추측이 가능했다. 아마 천부장이 그 이집트 사람을 언급한 것은 그를 잡아들였다는 것으로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 유대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이라고 말한다. 다소는 분명히 유명하고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동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지리적 이점으로 철학과 학문이 발달하고 유명한 대학도 있었다. 소위 소아시아의 아테네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도시의 시민권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다소 출신’, 그 도시의 시민 이라는 소개는 자신이 천부장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님을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바울의 이 자부심은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일 뿐이다. 더 큰 자부심과 자유는 ‘그 유명한 도시’에서 오지 않는다.
1 “동포 여러분,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2 군중들은 바울이 히브리 말로 연설하는 것을 듣고, 더욱더 조용해졌다. 바울은 말을 이었다.
3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4 나는 이 ‘도’ 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내 말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가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받아서, 다마스쿠스로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신도들까지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자기를 ‘유대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율법의 엄격한 방식으로 교육받고 자라왔는지를 말한다. 아마 청중의 불분명한 교육수준의 여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열성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더욱 높은 수준의 교육과 헌신을 가지고 봉사해왔는지를 설명하고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출신지역을 뛰어넘어서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교육 아래서 바리새인으로써의 삶을 엄격하게 따랐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헌신과 열성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박해하고 죽이며 남자든 여자든 묶어서 감옥에 넣은 일까지도 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심지어 그것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증언할 수 잇을 정도로 분명한 일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성전 관리자들과 밀접한 연결이 되어있었다는 ‘자격’의 증명이었다. 그로인해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일조했고, 다마스쿠스의 신자들을 잡으러 떠난 것까지도 분명히 확인 가능한 일들이었다.
바울의 변명의 서순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배경, 가치관과 자격의 증명을 차례로 보여줌으로써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해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정말 이야기하려는 핵심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울에게는 오직 진짜 복음.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6 “가다가, 정오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8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 하셨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이 비추고 부활의 주님은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하신다. 이전의 9장의 내용과 차이가 느껴지는 이유는 누가가 이 사건을 서술하는 것과 바울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 사이에서 생길수밖에 없는 차이 일것이다. 아무리 바울이 동일한 이야기를 많이 전했고, 그것을 누가가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일지라도 제 3자의 설명과 실재 경험한 사람의 서술에 차이가 생길수밖에 없다.
바울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빛’이다. ‘정오’의 빛보다 더욱 밝은 빛으로 비추며 나타나셨다는 점은 이것이 꿈에서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준다. 어떤 빛보다 밝은 빛은 바울을 강타했다. ‘주님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이 바로 이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군중들과 무척이나 가깝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라는 설명이 다른 곳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적절했다. 그들의 가슴 깊은 곳이 찔렸다. 그들은 이 증언 앞에서 회피할 수 없다. 그분은 분명히 살아나셨고 나타나셨다.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그 때에 내가 ‘주님,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더니,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는 네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누가 말해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빛의 광채 때문에 눈이 멀어서, 함께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빛은 보지만 음성은 듣지 못한다. 9장은 소리는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두 상황적 설명은 서로 보안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소리는 듣지만, ‘주님의 음성’은 결코 듣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빛을 보지만, 누구와 대화하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이로써 바울의 일행이었던 자들과, 오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은 동일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 구약에서 그토록 심판을 예고했던 우상숭배자들의 모습이다.
바울은 주님께 어떻게 하길 원하시느냐고 질문한다. 바울은 이 일이 실재임을 작관적으로 알고 알게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주님’께 복종하기를 선택한다. 주님은 다마스쿠스에 가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말해 줄 것’이라고 하신다. 바울의 소명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확실하게 확인되고 교차로 증명된다. 우리는 아나니아에 의해서 교차적 검증을 거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의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할 존재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예고된 일이었고, 성취된 일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에 대해서 전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시민권자임을 감추고 자신이 바로 정통 유대인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전하는 이 복음이 생명을 걸고라도 전해 마땅한 ‘복음’인지를 전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그 간절함과 확신으로 경험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유익하다고 여길만한 것조차 복음 앞에서 무익하게 여기며 오로지 부활의 주님만이 나의 앞에 유일하신 존재가 되시길 바라는 바울의 간절함을 공유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 복음에 사로잡힌 삶을 간절히 구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