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가,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다. 무리가 다시 예수께로 모여드니, 그는 늘 하시는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은 하시던 대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님께 시험하며 질문한다. 이어지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유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혼이 허락되는 근거들이 랍비들 사이에서 논의 되긴 했지만 이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혼이 가능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꽤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간음’때만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소수 의견부터 어떤 이유든 함께 사는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견까지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시험은 이 넓은 스펙트럼의 의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였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분란을 야기하고자함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의 원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신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4 그들이 말하였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예수님은 이른바 ‘장로들의 전통’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모세’의 명령을 먼저 꺼내드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명령’했는지 질문하지만, 그들은 모세가 ‘허락’했다고 답변한다. 그들은 모세의 ‘명령’이라는 더 높은 수준이 아니라 ‘허락’의 차원에서 답변한다. 물론 마태복음 더욱 강력하게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 했는지 질문하지만 엄격하게보면 신명기 24장에 등장하는 이혼의 내용을 ‘명령’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외에 토라에서 이혼관계를 명령하는 곳은 없기 때문에 신 24을 근거로 할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질문과 의도가 본질이 아닌 넓은 방향성으로 퍼질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예수님은 이혼 증서와 관련한 명령이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지적하신다. 이제 그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토라’가 말하는 결혼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지적하신다. 모든 율법의 원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순간으로 돌이켜봐야한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만드신다. 둘이 아닌 한 몸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 존 월튼은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는데, 갈빗대가 사람의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판’으로 인식되듯이, 갈빗대를 빼냄으로써 아담의 절반을 완전히 갈라놓는 방식의 수술이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하와에게 내 살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했을 때에는,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정확하게 절반을 떠올린 것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동일하다. 여자는 남자의 ‘일부’가 아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데 있어서 ‘부속물로써 완전하게 만드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온전한 하나님 형상은 완전한 하나를 경험할때부터 시작될 수 있다. 따라서 결혼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임과 동시에 태초로부터 만드신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관계다. 따라서 결혼을 충실하고 성실히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을 범하는 것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내용을 제자들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것 같다. 제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금 질문했고 예수님은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던 자들이 ‘간음하면 이혼해도 좋다’ 라는 주장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답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율법’의 원리가 지향하는 바가 ‘창조의 원리’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던 원형의 모습을 찾는 것이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칙과 원론에 사로잡혀 분쟁을 겪는 중인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원론’적인 [창조 원리]는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모든 사항이 성경에 나와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에 따라서 그 원리에 입각한 방향성을 재설정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 우리의 가정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작은 교회들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