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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기적과 반응 / 마가복음 7:24–37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두로 지역으로 이동하신다. 두로는 갈릴리 북부와 접한 중요한 상업 도시였다. 헤롯 대왕 시절부터 두로와 팔레스타인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갈릴리 인접 지역에 경제적 주도권을 상당히 행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거리가 먼 곳이어서 요세푸스의 경우 두로 사람을 “우리의 악명 높고 가장 지독한 적”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예수님이 두로에 가시는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신 행동은 이전의 내용들을 참고할 때 매우 평범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피하길 원하셨다. 그러나 그곳조차도 예수님의 명성이 널리 퍼져있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발 앞에 엎드린다. 그녀의 간절함은 곧바로 엎드려 간청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앞으로의 도전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여성을 소개하는 말은 ‘그리스 사람’,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다. 유대인 선생이 이방인 여성을 함부로 만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딸의 상태가 귀신들렸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부정’의 이미지는 매우 공고해진다. 그녀자체가 이방인이었고, 여성이었으며, 귀신들린 딸을 가진 부정성으로 가득차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달라는 여인의 요청은 완전히 묵사발되듯 무시된다. 예수님은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매우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말씀을 하신다.
이정도의 모욕을 듣고도 계속해서 자신의 요청을 밀어붙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의 절박하고 간절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도전을 감수하고 많은이들이 아마도 포기했을 지점에서 믿음의 도전을 시도한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여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받아서 자녀들이 우선순위로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옳지만 그 부산물정도는 개들도 나눠 받는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셨다. 그녀는 자신을 ‘개’라고 인정할 만큼 낲작 엎드리며 자신을 비웠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예수님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치유’가 발생한다. 앞선 기적들에서 예수님의 ‘만져주심’ 또는 ‘만짐’이 동반한 것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행동이나 특별한 문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여자’가 돌아간 시점은 아직 치료에 대한 확인을 하지 못한 시점이었다는 점도 생각해보자. 그녀는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다. 거기에 이미 믿음의 실행과 실천이 이미 내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엎드림과 믿음의 급진적인 결단은 딸을 낫게 만들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예수님의 행적은 두로와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를 지나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이 길은 매우 빙 둘러 오시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유대 영토 바깥에 머무르셨고 그 이유는 아마도 상반된 두 가지의 태도, ‘왕으로 삼으려고하는 군중들’과 ‘예수님에 대한 반대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오셨고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귀 먹고 더듬는 사람을 데려온다. 이미 이전의 기적들에 의해서 유명한 치유자로 유명해졌을 것이므로 이런 반응이 이상하지는 않다. 예수님은 무리와 귀 먹은 사람을 분리시키신다. 그리고 손가락을 넣으시고, 침을 뱉어 혀에 손을 대신다. 이 ‘만져주심’은 대단히 이례적으로 보이는데, 이전의 방식에서는 그런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침’을 뱉고 바르는 것은 현대의 시선에서는 긍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관점에는 황제의 침, 또는 마법사의 ‘침’이 일종의 효력있는 치료재로 여겨졌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의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보여졌을 장면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그에게 ‘말’은 들리지 않음으로 경험될 수 없는 무엇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만지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해, 이 위대한 치료자가 단 한 사람, 자신을 위해 수고하고있음을 깊이 경험했을 것이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병으로 아파하는 자에게 직접적인 치료의 만져주심을 행하신것과 상관없이 진짜 치료의 핵심은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탄식’ 하신다. 깊은 감정적 표현이 이 치료의 장면에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질병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로를 향해 눈물 흘리셨던 깊은 감정적 표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 우주적 왜곡에 대한 깊은 탄식과 긍휼을 가지고 계신다.
지금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이 환자만을 따로 데려가신 것이라면 ‘에바다’ 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이 환자만이 유일하다. 그는 처음으로 이 말을 들었을 것이고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이었을까. ‘에바다’ 라는 말이 단수적 형태라면 귀와 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하나에 명령하신 것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열림이 모든 감각과 상태가 ‘열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36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37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이전의 상황과 같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그들’에게 명령된 것으로 보아서, 이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더 널리 퍼뜨린다. 이 놀람은 이전의 기적에 대한 반응들의 표현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더욱 강조된 형태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는 사건은 이사야에서어 하나님의 때, 마지막 종말에 일어난 사건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는 현장에 그들이 놓여있다는 말이다.
기적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살펴보게 된다. 묵상해보고 싶은 점은 ‘믿음을 가지고 곧바로 자리를 떠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즉각적인 반응’과 처음으로 ‘열리라’ 라는 말을 들었을 귀먹고 혀가 굳은 사람의 감격적 반응이다. 우리는 믿음에서 ‘즉각적’ 반응이 필요한데도 얼마나 주저할때가 많은지 모른다. 믿음은 ‘나’의 상태와 지위를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처음 듣게 되었을 그 단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핵심적’ 말이 되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을 말리면 말릴 수록 ‘열리라’ 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파급력 있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열리라’ 라는 단어의 감격은 처음 듣는 사람이나 지금까지 우리에게도 굉장한 감동을 준다. 우리는 우리 삶을 규정할만한 한 단어, 한 문장을 우리 주님께 들었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을 다시 힘있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주는가? 말씀 묵상하면서 믿음의 즉각적 반응과, 그런 순종의 삶의 결과 한 단어, 한 문장을 듣고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