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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하나님을 끌어안게 될 그 때/ 예레미야 31:10–22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0 “뭇 민족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고, 먼 해안지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 주신다.’
11 그렇다. 나 주가 야곱을 속량하여 주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냈다.
12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13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14 그 때에는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며,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다시 모으실 때 어떤 연약하고 병이 들어 오기 힘든 자들도 포함된다고 나눴다. 그리고 그 인도하시는 인도자가 선한 목자로써 한 마리의 양도 도태되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을 속량하시겠다는 말씀은 어제의 본문과 이어서 생각할 때 단지 ‘북 이스라엘’만을 한정하지 않고 회복된 전체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들이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좋은 선물, 곡식과 새 포도주, 기름과 양 새끼,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회복되는 것은 단지 ‘땅을 되찾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전에 약속되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회복하여 받게 될 것이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초토화 되었고, 남 유다 또한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은 비극과 재앙의 땅이 되어버렸다. 예레미야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경고해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이 돌아오는 땅을 출애굽하던 당시의 사람들이 들었던 ‘약속의 땅’의 처음 수준으로 되돌려놓고 계신다. 그 땅은 더 이상 이전의 땅이 아니다. 분명 원래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을 다스리시는 분의 통치에 따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위로와 소망으로 넘쳐나게 만드신다.
15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16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17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라헬은 요셉의 두 아들들인 북 왕국을 대표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남북이스라엘의 경계선에 있었던 남왕국 베냐민의 어머니이다. 라마는 포로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면서 도중에 멈추어서 울었던 장소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제 그 눈물이 그치고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희망을 가지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때’에 일어나게 될 일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약속된 70년이 지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서 헤롯이 유아들을 살해할 때 적용되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는 것은 실재로 헤롯의 끔찍한 유아살해 행위에 벌어지게 될 베들레헴 근처의 슬픔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희망과 소망’이 회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집트에서 다시 되돌아오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히 회복되는 ‘그 때’의 완성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18 “에브라임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가 분명히 들었다. ‘주님, 우리는 길들지 않은 짐승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이제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19 주님을 떠난 다음에 곧 뉘우쳤습니다. 잘못을 깨달은 다음에 가슴을 치며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저의 젊은 시절의 허물 때문에 저는 수치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은 탄식 소리를 ‘들으신다’. 에브라임의 탄식은 자신들이 ‘길들지 않은 짐승’처럼 배회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 본문에서 그들이 전혀 돌아오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한탄하고 탄식하기만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자신들이 다시 되돌아갈 능력이 없음을 말하며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은 주님을 떠나고 후회하고 뉘우쳤다고 말한다. 그 허물로 인해 수치와 수모를 겪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 책임에 대해서 스스로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배신한 자들을 ‘나의 귀한 아들’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부르신다. 책망하심과 동시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하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죄’의 문제에 대해서 무작정 ‘허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심으로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한편 그럼에도불구하고 책임을 물으시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 간절히 호소할 때 기꺼이 사랑으로 긍휼을 베풀어 회복시키신다.
21 “너는 길에 푯말을 세우고, 길표를 만들어 세워라. 네가 전에 지나갔던 길과 대로를 잘 생각하여 보아라.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너희가 살던 이 성읍들로 돌아오너라.
22 너 방종한 딸아, 네가 언제까지 방황하겠느냐? 주님께서 이 땅에 새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
두 구절은 상반된 시선을 보여준다. 방종한 딸은 ‘방황하는 딸’이다. 돌아오는 딸은 ‘처녀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방종하며 떠돌아다니는 딸은 하나님께로 되돌아올 때 새롭게 창조된 존재처럼 처녀 딸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때 신실하지 않은 음란하고 방종하는 이스라엘이 신실하신 남편을 껴안듯 하나님을 껴안는 것이 허락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태,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보아야겠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들과 여정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삶에 대해 ‘책임’이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제한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아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의 사랑이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준다고 천편일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를 따라 사는 삶에서 제공되는 ‘은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따라가기로 작정하고 그 은혜에 삶을 온전히 맡길 때, 하나님은 기꺼이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껴안는 것을 허락하시리라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다시 아들의 신분으로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복구되듯이 방탕하고 음란한 신부가 그 죄를 뉘우치며 신랑이신 분께 되돌아 간다면 기꺼이 남편이신 주님이 우리가 그분을 껴안는것을 ‘허락’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만드신다.
오늘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안아주시는 사랑을 간구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