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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왕상 18:30-46 / 순종을 통해 넘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왕상 18.30-46
30 이 때에 엘리야가 온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가까이 오니,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그리고 엘리야는, 일찍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대로,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
32 이 돌을 가지고 엘리야는 주님께 예배할 제단을 다시 쌓고, 제단 둘레에는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도랑을 팠다.
우리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갈멜산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제단은 무너져 있었고, 폐기되어있었다. 이것은 무너져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엘리야는 열두개의 돌을 모으고 예배드릴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제 이 제단 주위에 두 세아, 대략 30리터 정도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의 도랑을 판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그리 큰 크기의 도랑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알 기 힘들지만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가능성, 비가 내릴 가능성을 담은 상징적 제단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33 그 다음에, 나뭇단을 쌓아 놓고, 소를 각을 떠서, 그 나뭇단 위에 올려 놓고,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로 하니,
34 엘리야가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니, 그는 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세 번을 그렇게 하니,
35 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 흘러서, 그 옆 도랑에 가득 찼다.
물통 네 개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세 번 붓게 된다. 총 물 12통이 제단에 뿌려진다. 이것도 매우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제단에 뿌려지는 12통의 물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뭄의 시대에 물을 얻기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고 설명해왔는데 이만큼의 물을 쏟는 것은 매우 힘겨운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피요 생명’ 이라고 여겨서 땅에 쏟았던 것처럼 이것은 마치 ‘피처럼’ 여겨질만한 것이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피’를 흘린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상징과 의미가 쏟아부어지고 있다.
36 제사를 드릴 때가 되니,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돌보신 주 하나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님의 종이며, 내가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37 주님, 응답하여 주십시오. 응답하여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웠고, 도랑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말려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잡아라. 한 사람도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곧 그들을 사로잡았고, 엘리야는 그들을 데리고 기손 강 가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명’ 되기를 간절히 구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한다.
비를 내릴 신은 바알이 아니다. 천둥과 번개를 무기로 삼는 신은 꿈쩍하지 않았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과 물까지 태워버린다. 이것은 기대되는 사건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적당히’ 응답하시지 않고 ‘넘치게’ 응답하신다. 이로써 백성들이 하나님임을 ‘확실히’ 알고 돌이키도록 만드신다. 의심의 여지는 있더라도, 그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명확한 진실’을 마주하고 있으며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을 사로잡고 기손에서 그들을 모두 죽인다. 우리는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지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을 때 오바댜에 의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이 지켜지고 보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욱 강력한 박해를 준비했을지 모르는 아합의 가문의 전략은 이 영적 전쟁에서 완전히 뒤집혀 버린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도망갈 곳이 없다. 너무나 확실하게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심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행동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다.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올라가서, 음식을 먹었다.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43 그리고는 그의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 보라고 하였다. 시종은 올라가서 보고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다시 그의 시종에게, 일곱 번을 그렇게 더 다녀오라고 하였다.
빗소리는 ‘정당히’ 들리지 않고 ‘크게’ 들린다. 이 말이 보장하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의 확실성을 엘리야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 비는 ‘적당히 살만한’ 비가 아니라 엄청난 ‘폭우’일 것이다.
아합은 ‘올라가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간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꼭대기에서 언약을 받았을 때 그 중간에서 장로들이 식사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서도 확인하겠지만, 왕은 ‘말씀을 가진자’, ‘말씀을 선포하는 자’ 뒤에, 밑에 있어야 확실하고 넘치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그 시종은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부터 떠올라 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바다에서부터 작은 구름이 떠올라 오고 있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바알은 바다의 신을 정복했다. 그런데, 바다의 신을 이긴 바알이 오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참패했다. 바알은 살아있지 않다.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손바닥만한 구름은 바알의 완전한 제거의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바알은 구름을 타는 자로 묘사되었지만, 진짜 구름을 타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사사기를 떠올려보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그의 철병거가 비와 천둥 번개가 움직이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를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기손 시내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죽고 비와 천둥과 번개를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이 증명되었다는 것에서 두 이야기의 공통점이 엿보인다.
비는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 따라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는 것은 폭우 때에는 앞으로 나아가기 매우 어려운 이동수단이 될 것도 두 이야기 모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다.
45 그러는 동안에 이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캄캄해지고, 바람이 일더니, 곧 큰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곧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46 주님의 능력이 엘리야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엘리야는 허리를 동여 매고, 아합을 앞질러서, 이스르엘 어귀에까지 달려갔다.
‘큰 비’가 퍼붓는다. 질척거리는 땅을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동한다. 갈멜에서 이스르엘은 대략 30km 정도일 것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허리를 동여 매고 아합을 앞질러 달려간다. 비를 뚫고 달려서 병거보다 앞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능력이 엘리야와 함께 하고 계신다. 엄청난 폭우와 병거를 앞지르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 없이’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들로 보인다.
제한 없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믿음은 ‘앎’에서 이뤄지는것이 아니라 ‘순종’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벌어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순종과 복종 속에서만 믿음이 생겨난다.
본 회퍼는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이 가능해지는 상황 속으로 부르신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구체적으로 부르시며,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라신다. 구체적인 복종 속에서만 인간은 실제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복종 속에서 믿음을 되찾아 가는 것처럼 우리도 복종 안에서 믿음을 되찾을 수 있고, 무너진 제단을 수축할 수 있다. 오늘 그 순종의 삶에서 넘치듯 부어주시는 은혜를 구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