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였다.
2 하나님께는 주권과 위엄이 있으시다. 그분은 하늘 나라에서 평화를 이루셨다.
3 그분이 거느리시는 군대를 헤아릴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빛이 가서 닿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느냐?
4 그러니 어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겠으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어찌 깨끗하다고 하겠는가?
5 비록 달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밝은 것이 아니며, 별들마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청명하지 못하거늘,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가 얼마나 무궁한지를 설명한다. 그와 대비하여 사람의 비참한 상태를 잘 지적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비교할 때 구더기 같은, 벌레 같은 존재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빛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런 빌닷의 지적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옳은 이야기이지만, 대상도 불분명하고, 포인트가 될만한 탁월한 ‘지혜’의 빛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모두가 다 인정하고 알만한 내용이다. 어떤 사람은 빌닷의 이 짧은 말을 ‘시큰둥한 장광설’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친구들의 지적도 힘을 다한것처럼 보인다. 욥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욥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말하는 것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으며 경험적 지혜로는 악이 평안한 인생을 산다는 수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오는 일을 반박하기에 이제는 질려버린것 같다. 다만 ‘장광설’로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다.
빌닷의 말처럼 하나님은 무한한 빛으로 세계를 비추실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인간이 비참한 상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지금 이 순간에 왜 필요했는지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고 있을 뿐이다.
1 욥이 대답하였다.
2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여 주니, 고맙다. 나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도와주다니!
3 너는 우둔한 나를 잘 깨우쳐 주었고, 네 지혜를 내게 나누어 주었다.
4 그런데 누가, 네가 한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누구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런 말을 하는거냐?
욥이 정말 고맙게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역설이며 오히려 모욕적인 말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자기의를 폭로하는 말이다. 친구들은 욥을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도와줄 목적으로 ‘회개’하라고 그토록 말하고 있지만, 그래서 참된 지혜를 알려줄 목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지만 누구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렇다면 욥은 질문한다. 그 말들의 ‘대상’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 말들의 [근거와 기원]은 어디로부터인가? 친구들은 이 말들의 영감이 [전통, 과거의 유산, 고대의 지혜,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그들의 지혜는 그곳으로부터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얼마나 자기기만적 오류에 빠져있는지를 스스로 폭로했다.
친구들은 ‘진리’를 알고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실재로 그들은 ‘옳은’ 말들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짜 지혜]를 소유해서 지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발견했는지 질문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고 있다. 그것을 욥은 지적하는 것이다.
5 죽은 자들이 떤다. 깊은 물 밑에서 사는 자들이 두려워한다.
6 스올도 하나님께는 훤하게 보이고, 멸망의 구덩이도 그분의 눈에는 훤하게 보인다.
깊은 물 밑은 혼돈과 공허, 어두움과 괴물이 사는 공간으로 이해됐었다. 스올도 지하의 죽음 공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혼돈과 공허, 스올과 멸망의 구덩이조차도 ‘훤하게’ 보고 계신다. [악]은 불가해하고 하나님이 손쓸 수 없는 강력한 힘과 권세로 인식되기 쉽지만, 실재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
7 하나님이 북쪽 하늘을 허공에 펼쳐 놓으시고, 이 땅덩이를 빈 곳에 매달아 놓으셨다.
8 구름 속에 물을 채우시고, 물이 구름 밑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게 막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9 하나님은 보름달을 구름 뒤에 숨기신다.
10 물 위에 수평선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
우리는 당시의 시대의 우주관을 염두하면서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시적’ 설명들이며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함께 비교하며 읽게 만든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공간을 만드시고 질서와 경계를 만드셨다는 점이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죽음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정벌하시고 질서와 경계를 만드셔서 공간을 만들어내실 수 잇는 분이시다.
11 그분께서 꾸짖으시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흔들린다.
12 능력으로 ‘바다’ 를 정복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부순다.
13 그분의 콧김에 하늘이 맑게 개며, 그분의 손은 도망 치는 바다 괴물을 찔러 죽인다.
14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분이 하시는 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는 것도 가냘픈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그분의 권능에 찬 우레 소리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능력은 지으신 세계의 근원조차도 흔들어버리실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없애버리실 수도, 고치실 수도 있다. ‘바다’와 ‘라합’은 바다에 사는 괴물 리워야단에 대한 설명으로 이미 알아봤었다. 강력한 바다 괴물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속에서 정복당할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괴물이 날뛰며 도망칠찌라도 하나님의 손은 악을 정벌하신다.
욥의 선명한 설명은 하나님이 ‘악’을 정복하시고 정벌하실 수 있는 분명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점이다. 그 지혜와 권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경험에서 느끼는 온갖 부조리들과 악의 발흥과 흥왕함을 왜 내버려두시는가? 그것이 욥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욥의 질문을 다시 돌아보면서 고통의 문제가 ‘창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과 공허’를 질서와 경계, 공간과 채우심으로 바꾸시는 일이었다. 우리 인생의 혼돈과 공허, 악의 발흥과 고통의 문제를 질서로 만드시고 전혀 새로운 공간과 채우심을 행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그 최악의 혼돈과 공허가 극복된 ‘새로운 창조’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끝없는 인생의 질서와 경계, 교회라는 새로운 공간과 성령님의 임재로 채워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새롭게 창조된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창조를 허락하심을 감사하며 오늘 그 새창조를 경험하는 하루 되길 바라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
묵상 포인트
1.
하나님은 고통의 모든 이유와 원인을 아신다.
2.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과 공허를 질서와 채우심을 만드시는 과정이었다.
3.
하나님은 고통을 정복하시며 질서와 채우심으로 일하실 것이다.
4.
십자가는 그 고통의 정복과 새로운 질서, 채우심의 완벽한 본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