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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QT] 생명을 거두시는 분도, 되돌려주시는 분도 / 열왕기하 4:18-37 / #매일성경 #큐티 #성경공부

18 그 아이가 자랐는데, 하루는 그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곡식 베는 사람들과 함께 곡식을 거두고 있는 곳으로 나갔다.
19 갑자기 그 아이가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머리야!” 하면서, 아버지가 듣는 데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아버지는 함께 있는 젊은 일꾼더러, 그 아이를 안아서,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라고 일렀다.
20 그 일꾼은 그 아이를 안아서,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점심 때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21 그러자 그 여인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사람이 눕던 침대 위에 그 아들을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왔다.
아이는 자라서 아버지와 함께 곡식을 베는 곳에 일을 하러 간다. 아이는 갑자기 아이고 머리야!를 외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젊은 일꾼에게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라고 이른다. 하지만 아이는 곧 죽고 말았다.
우리는 앞선 이야기에서 이 여인에게 부족한 것이 없었고, 아이가 없었지만 그에대한 요청도 없었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시는 분’이며 ‘미래’를 허락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셨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원망할만하다. 그리고 여인은 실재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아들을 원한적이 없다고 하소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생명을 [거두어가시는 잔인한 분이신가?]
우리는 땅을 차지함에 있어서 왕들의 ‘어중간한 태도’가 실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살펴봤었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얼마나 ‘간절한 태도’로 하나님께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생명을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주시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22 그리고 그 여인은 남편을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다. “일꾼 한 사람과 암나귀 한 마리를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내가 얼른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녀오겠습니다.”
23 남편이 말하였다. “왜 하필 오늘 그에게 가려고 하오? 오늘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지 않소?” 그러나 그의 아내는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며,
24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꾼에게 말하였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늦추지 말고, 힘껏 달려가자.”
여인은 남편에게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여인은 의도적으로 아들이 ‘죽었다’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겠다’ 라는 의지처럼 보이기도하다. 남편은 확실히 아들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왜 가려고하는지 질문한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그녀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계속 반복할 수록 그녀가 붙잡는 것이 [하나님]임이 강조될 것이다.
25 이 여인은 곧 갈멜 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렀다. 때마침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 여인을 보고, 그의 시종 게하시에게 말하였다. “저기 수넴 여인이 오고 있구나.
26 달려가서 맞아라. 부인께 인사를 하고, 바깥 어른께서도 별고 없으신지, 그리고 아이도 건강한지 물어 보아라.” 게하시가 달려가서 문안하자, 그 여인은 모두 별고 없다고 대답하였다.
27 그런 다음에 곧 그 여인은 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가서, 그의 발을 꼭 껴안았다. 게하시가 그 여인을 떼어 놓으려고 다가갔으나, 하나님의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였다. “그대로 두어라. 부인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쓰라린 괴로움이 있는 것 같구나. 주님께서는, 그가 겪은 고통을 나에게는 감추시고, 알려 주지 않으셨다.”
28 여인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예언자님, 제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하였습니까? 저는 오히려 저 같은 사람에게 농담을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인은 갈멜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 에게 이르렀다. 우리는 엘리야도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적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한 오버랩을 보여주는 것처럼 장소가 ‘갈멜’이라고 제시된다. 하나님의 임재와 승리가 일어난 곳에 죽음과 슬픔을 짊어지고 온 여인이 오르고 있다. 약속되지 않은 만남이기에 이전처럼 게하시가 그 중간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인은 ‘모두 별고 없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이는 죽었다. 그렇다면 ‘별고 없다’ 라는 말은 아직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게하시를 두고 ‘하나님의 사람’ 에게로 간다. 그리고 엘리사의 발을 꼭 껴안는다. 이런 태도는 간절하지만 예의에 벗어나는 태도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엘리사의 발을 꼭 껴안는다. 여인은 엘리사에게 ‘제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했습니까?’ 라고 말함으로써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내러티브를 기술하는 기술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여인은 단 한번도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말하였다. “허리를 단단히 묶고, 내 지팡이를 들고 가거라.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인사를 받더라도 그에게 대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거든, 내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 위에 놓아라.”
30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는 말하였다. “주님의 살아 계심과 예언자님의 목숨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언자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엘리사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그 부인을 따라 나섰다.
31 게하시가 그들보다 먼저 가서, 그 아이의 얼굴에 지팡이를 올려놓아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게하시가 엘리사를 맞으려고 되돌아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깨어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시켜서 아이를 살리려고한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사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살아계심’ ‘목숨’ 이런 단어들이 반복되며 이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책임지고 계시다는 점이 강조될 것이다.
게하시가 그들보다 먼저 가서 시키는대로 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여인의 간절한 간구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이야기에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 누구냐에 방점이 찍혀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인의 간절함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임이 강조되므로 엘리사를 통해서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32 엘리사가 집 안에 들어가서 보니, 그 아이는 죽어 있었고, 그 죽은 아이는 엘리사가 눕던 침대 위에 뉘어 있었다.
33 엘리사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엘리사와 그 죽은 아이 둘뿐이었다. 엘리사는 주님께 기도를 드린 다음에,
34 침대 위로 올라가서, 그 아이 위에 몸을 포개어 엎드렸다. 자기 입을 그 아이의 입 위에 두고, 자기 눈을 그 아이의 눈 위에 두고, 자기의 손을 그 아이의 손 위에 놓고, 그 아이 위에 엎드리니, 아,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35 엘리사가 잠시 내려앉았다가, 집 안 이곳 저곳을 한 번 거닌 뒤에 다시 올라가서, 그 아이의 몸 위에 몸을 포개어 엎드리니, 마침내 그 아이가 일곱 번이나 재채기를 한 다음에 눈을 떴다.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수넴 여인을 불러오게 하였다. 게하시가 그 여인을 불렀다. 그 여인이 들어오니,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37 그 여인은 들어와서, 예언자의 발에 얼굴을 대고,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여인은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죽어있고, 침대 위에 누어 있었다. 엘리사는 방으로 들어가 죽은 아이와 독대한다. 엘리사는 기도한 후에 아이 위에 몸을 포개어 엎드린다. 우리는 ‘죽은 자’의 신체에 몸을 접촉하는 것이 부정하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엘리사의 이런 행위는 ‘부정함’을 각오한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부정함이 전염되지 않고 생명력이 몸이 따뜻해짐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사는 잠시 후에 동일한 행위를 반복함으로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를 하고 깨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아이의 몸과 엘리사가 두 번 겹쳐누운 것, 기침을 일곱번 한 것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과 ‘기술’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주셨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으시며 다시 되돌려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상태와 직결된다. 하나님은 땅과 자손을 주실 수도, 빼앗으실 수도, 다시 되돌려주실 수도 있다. 그들의 인생과 삶과 삶의 터전과 미래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하실 수도, 거두어 가실 수도, 다시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전부 신뢰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그 전적인 신뢰 속에서만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의 심정처럼 우리도 주님을 오로지 선택하길 결단하며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자.